[판타지 중편소설] 그 남자와 이야기하다(2)

by 주애령

붙잡았나요?


아니. 상대가 날 두려워한다면 구태여 쫓아가 더 겁을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달리기를 멈췄지. 홍콩은 아주 복잡한 도시라서 길 잃기 쉬워. 천천히 걷자마자 나는 내가 전혀 모르는 곳에 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빙글빙글 돌면서 불타는 네온사인도 어깨를 온통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금발 여자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어. 나는 잠시 방향감각을 잃고 이리저리 걸어 다녔지. 네온사인 대신 빨랫감이 사방에 나부끼더군. 열대야를 피해 밖으로 나온 쪼글쪼글한 노인들과 반나체의 아이들이 돌아다니고, 여자들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금방 사라지고. 더럽고 벌레가 들끓지만 빈민가 특유의 동물적인 생명력이 꿈틀대는 그런 곳이었어.

잠시 매료된 채 걷고 있었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좋아하니까. 이리저리 거닐었지만 날 눈여겨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 그곳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는데도 말이야.


언뜻 문간에 웅크린 노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노인 등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손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착각인가 싶어서 다시 보니까 웅숭그리고 있던 노인네는 사라지고 문간에 한 남자가 서서 손을 흔들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선뜻 발을 들여놓기에는 금방 마음이 나지 않는 곳이었어. 아무튼 난 어두운 문간에 들어섰지. 손짓한 남자가 나와 같은 존재라는 걸 느꼈으니까. 문은 복도로 들어가는 문이었고, 빛 한점 없는 좁은 통로를 걸어내려가면서 난 서늘한 공기를 느꼈어. 그땐 여름이었는데도 말이야.


계속 걷다가 잠시 발을 멈추고 그대로 몇십 초 동안 서 있었어.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내 두 눈이 머릿속 가득히 떠올랐기 때문이었어. 그때 내 머리에 그려진 두 광원이 바로 눈앞에 명멸하기 시작했어. 불규칙적으로 깜박였지. 상대도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보고 있으려니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어.


잠시 후 차갑고 강한 손이 나를 잡았고, 나는 그대로 이끌려갔네.


날 이끈 손은 얼마 안 가 작은 방에 도착했네. 광원의 주인은 변화했을 때의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이지만 나보다 최소한 30년은 오래된 듯한 뱀파이어였어.


- 내 딸이 자넬 봤다네.


그의 음성은 방안에 낮게 울렸어. 일부러 겁주려는 것 같더군.


- 에티켓이 좀 없는 아이군요. 식사 중에 방해는 말아야죠.


- 그런 예의는 가르치지 않았지.


-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 자네야 어떻든 난 오래전에 살인을 그만뒀네.


- 아, 그래요?


난 일부러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슬쩍 방을 둘러봤지. 하도 어두워서 시커먼 시멘트 벽 같은 것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을 뿐이었어. 그는 촛불을 양손으로 꽃잎처럼 둥그렇게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 노인을 죽였나?


- 네?


- 노인을 죽였냐고.


나는 대답하길 망설였어. 그는 나보다 훨씬 강해 보였는데 죽였다고 하면 날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빈틈없는 자세가 그렇게 보였지.


- 살인은 죄네.


그는 낮게 웅얼거렸지.


- 역겨운 범죄라고.


- 그건 사랑하지 않을 때 얘기죠.


- 무슨 소리지?


-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요? 사랑하지도 않고 죽이면 그건 정말 죄라는 거죠. 법적으로는 물론 도덕적으로도.


- 궤변은 그만둬. 차라리 범죄는 억눌린 욕구의 미학적 표현이라는 어느 정신 나간 학자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군. 언제 이렇게 됐지?


- 70년쯤 전에.


- 얼마 되지 않았군.


- 당신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어.


- 70년 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대개 뱀파이어들은 말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언제 사람인지 알 수 있어. 하지만 넌 마치 방금 만들어진 존재 같아.


- 당신은 언제 ‘선택’ 당했죠?


그는 나를 향해 돌아섰어.


- 150년 전에. 북경에서.


- 농담이죠?


- 아니, 사실이야. 원한다면 그때 쓰던 물건을 보여 줄 수도 있어. 넌 70년 전 물건을 그대로 갖고 있나?


- 아니요.


- 난 꽤 갖고 있어. 보관을 잘했지. 향주머니도 있고 거울도 있어. 그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 난 아직 젊고 팽팽하고 기운이 넘치는데 곁에 둔 물건들은 나이를 먹고 썩고 골동품이 돼 있거든. 외계인이 된 것 같아.


그는 촛불을 손으로 끄고 날 바라봤어.


- 당신은 혼자 지내지 않는군요.


그는 어딘가 리더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네.


- 자넨 일족들을 만난 적이 있나?


- 일족들이요?


- 그래. 나의, 자네의 일족들. 똑같은 죄인들. 살인자들.


- 난 사람들과 더 많이 지내요. 그리고 지금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군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만나봤자 그다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 살인에 대한 자네의 재미있는 관점을 들려주면 꽤 즐거워할 텐데.


- 그 관점을 저한테 실천할까 봐 두렵군요.


그는 이 말에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어.


-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있지. 돌아가. 시간을 뺏어 미안하군. 더 권한다면 홍콩을 떠나게. 더 안전하고 싶다면 살인을 아예 때려치워.


난 들어온 길 그대로 나왔어. 호텔을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미처 풀리지 않은 것들이 얽혀 복잡했지. 다만 결심한 것은 다시 그를 만나고 싶다는 거였어. 그가 살인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니까. 호텔로 가다가 갑자기 새벽이 미친 듯이 보고 싶어 졌어. 그래서 바닷가로 갔지. 바닷가래야 해협 주변이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수줍게 살랑대는 검은 물과 대지에 꽂은 단검처럼 생긴 빌딩들이 숲을 이룬 풍경뿐이야. 하지만 난 바닷물 대신 하늘이 보고 싶었으니 별 상관하지 않았지. 물가에 편히 있을 수 있게 만든 타일로 만든 계단에 앉아서 앵무새처럼 서로 웅크리고 앉은 연인들이며, 점점 빛을 잃어가는 야경을 한 세 시간쯤 보고 있자니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린 눈을 얼른 비볐지.


먼저 달이 지고 별빛이 스러지고 하늘이 조금씩 희어지면 하루에 두 번, 불과 오 분에서 십 분 정도의 기막히게 아름다운 순간이 오지. 하늘이 온통 차갑고 맑은 블루로 물들어 버리는 거야. 하루 종일 맑은 날이 아니면 새벽이 하늘을 쓸어안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어. 그리고 태양이 나타나면 급히 긴 옷자락을 질질 끌면서 사라지는 거야. 그런 장면을 보려면 역시 공기가 맑은 곳이 좋겠지만 그날 홍콩의 새벽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어.


완전히 아침이 되기 전에 호텔에 들어가려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양쪽에서 동시에 누군가가 다가오더군. 미행을 당한 것 같진 않았는데 말이야. 상당히 숙련된 솜씨였지만 왠지 감정을 감추지 못한 것 같았어. 사람을 쫓아다니고 죽이는 데 이력이 난 나는 어젯밤 남자의 경고를 떠올리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가 때를 봐서 뛰기 시작했어.

괴한들은 매끄럽게 쫓아왔지만 난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서 금방 처지기 시작했어. 호텔로 가려고 했지만 입에서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더군. 처음에 도망칠 때 방향을 반대로 잡아 버렸으니까. 점점 따라 잡히는 것이 등에 느껴지자 나는 홍콩을 빨리 떠나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어.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되자 별로 기분은 좋지 않더군.


나는 시내로 도망치려 하는데 괴한들은 자꾸만 나를 바다 쪽으로 몰았어. 그리고 아까 내게 제압당한 상대가 나를 바닷속으로 덮쳤고, 나와 상대는 한데 엉켜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어. 따뜻한 바닷물 속에서 상대가 목을 조르자 나는 갑자기 의식을 놓쳐버렸고, 해협의 물은 유연하고 부드럽게 내 의식의 빈 곳으로 밀려들어왔어.


물결이 빠져나가자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어.


- 카이라고 부르게.


그가 말했네.


- 카이요?


- 그래. 내 이름이자 그룹의 이름이지.


난 몸을 일으켰네. 물기가 마른 대신 희고 짭짤한 가루가 온몸에 낀 게 마치 거친 파우더를 뒤집어쓴 것 같더군.


- 당신의 그룹이란 게 날 바다에 빠뜨린 건가요? 날 그냥 보내주는 게 불만스러웠나 보죠?


- 불만스러웠다기보다는 단순하게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어려서 그런지 모두 단순해. ‘선택’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 그냥 보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카이의 표정이 굳어졌어.


- 그들은 점점 나를 벗어나고 있어. 처음 모였을 때는 절대적으로 복종했지만 지금은 통제하기 힘들어. 내가 일단 보내줬는데 이런 짓까지 할지는 몰랐어. 하지만 자넬 데려온 걸 보니 아직 내게 조금은 영향력이 남아 있나 보군. 아마 우릴 감시하고 있을 거야.


- 날 처리하지 않으면 당신도 위험하겠군요.


- 맞아. 지금 난 이제까지 흡혈 식물을 키워온 기분이네.


갑자기 방 안으로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어. 나를 바다로 밀어 넘어뜨린 뱀파이어였지. 소금기가 가득 묻힌 나와 달리 깨끗한 몸이었어. 언제 ‘선택’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스물이 되기 전에 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머리카락은 길고 검은 데다 마르고 창백했지만 얼굴 윤곽은 선이 가늘고 섬세했어.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피하지 않고 똑바로 노려보면서 카이에게 말했지.


- 오랜만에 바다에 빠졌어요.


- 샤워했나?


카이가 대답했지.


- 소금기가 몸을 자극해요. 그래서 빨리 샤워했죠. 카이, 어떻게 할 거죠?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요.


- 넌 어떻게 하고 싶지, 마니?


그녀는 내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어.


- 당신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그룹을 자극하진 말아요.


- 모두 이상해지는 것 같아 기분 나쁘나?


- 그래요.


마니는 그제야 시선을 카이에게 옮겼어.


- 이제 다 그만둬요. 이젠 지쳤어요.


- 나도 알고 있어.


- 그룹도 당신도 지겨워요. 난 힘들어서, 다 그만두고 떠나고 싶은데, 당신은 잡지 않을 거라 알지만 멤버들은 아직 힘이 넘쳐요.


- 잘됐구나, 마니. 이 사람도 홍콩을 떠나야 할 텐데 같이 가는 건 어떻겠니?


- 난 혼자 가고 싶어요.


- 같이 도망치면 혼자 가는 것보다 손쉬울 텐데.


마니는 말이 없었지. 잠시 후 그는 방을 나가버렸어.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나간 자리를 시선으로 필사적으로 훑었지만 문의 이음매 같은 건 보이지 않았어. 마치 벽을 통과해버리는 것처럼 움직이더군.


- 그룹의 이름이 카이라고요?


-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어. 카이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어. 동족살상에 길들여져서 말이야.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뱀파이어가 아니야. 마지막으로 피를 빤 지가 10년도 훨씬 넘었을 걸.


- 10년 전에?


- 모두 어리다고 말했잖나. 카이는 나와 아까 본 마니를 합쳐 모두 열셋이지. 그리고 나를 빼고는 모두 어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어. 분명히 스스로 뱀파이어면서 자신을 인간이라고 열심히 착각하는 거야. 스스로의 본능을 열심히 부정하면서 그 본능에 충실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자들을 없애고 있지. 난 그들 전부를 홍콩에서 주웠어. 홍콩에 한번 뱀파이어가 날뛴 적이 있었거든. 난 일단 그 ‘아버지’를 없앤 다음 그 ‘자식’들을 입양했지. 벌써 적응하기 시작한 녀석들은 없애버리고 처음 피맛을 보고 나서 어쩔 줄 몰라 부들부들 떠는 아이들을 그러모은 거야. 벌써 15년 전 얘기지.


- 아까 나간 개체는 아주 인간적으로 느껴졌는데요.


- 아직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인간이라는 증거야. 비슷한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모험을 두려워하고 집단의 구속성을 미워하면서도 거기서 안식을 찾고. 서로가 없으면 못 견뎌하고 지긋지긋해하다가도 다시 찾곤 하지. 마치 애증으로 뭉친 노부부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노부부는 언젠가 죽음의 신에 붙들려가지만 그들은 세상이 끝장날 때까지 그렇게 살 거라는 거지. 끈질기게 서로에게 붙어있으려는 뱀파이어라! 아까 흡혈 식물이라고 말했지? 괴물을 만든 기분이야. 우리 일족이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인지 나는 요즘 너무 절실히 느껴. 내 몸속에서 새 피를 원하는 혈관이 피부를 뚫고 솟아오를 지경이라니까. 피에 대한 욕구는 참을 수 있지만 방랑벽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니도 그래. 떠나고 싶어 하거든. 혼자서. 나도 홍콩을 떠나고 싶네.

- 그럴 거면서 왜 카이를 만든 거죠?


- 아까 얘기한 ‘아버지’의 혈통 때문이야. 못 말리는 녀석이었어. 죽이느라 애먹었지. 아무 데서나 ‘자식’을 만들어버리는 건 물론이고 피가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였거든. 홍콩이 한때 그놈 때문에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네. 그 ‘자식’ 들을 처리하려니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인간성을 유지시키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죽인 뱀파이어 숫자를 고려하면 이제 카이도 해체될 때가 됐어. 게다가 카이는 인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써왔거든. 그런데 내가 이렇게 판단한 순간 카이는 이미 내 손아귀 바깥이야. 어떻게 하면 좋지, 류?


그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자 흠칫하고 말았어.


- 카이들에게 당신은 이제 힘없는 아버지 같은 존재군요.


- 나는 아니더라도 너를 죽이고 싶어 할 거야.


- 잠깐만요. 나도 자살기도 경험은 있어요. 별 짓을 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일족들을 죽인 거죠? 정말 어떻게 하면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겁니까? 난 죽여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는지도 몰라요. 솔직히 뱀파이어를 죽인다는 말도 사람이 아닌 동족에게선 처음 들어봐요.


카이는 곁눈질로 날 쳐다봤어.


- 뱀파이어는 뱀파이어만으로 죽일 수 있지.


- 뭐라고요?


- 인간은 절대 자신의 포식자를 죽일 수 없다는 뜻이야. 오직 뱀파이어들끼리만 서로 낳고 죽일 수 있어. 어떻게 죽이는지는 차마 얘기하기는 곤란하지만........


갑자기 문이 젖혀지고 한 떼의 뱀파이어들이, 카이들이 쏟아져 들어왔어. 아까 마주친 마니를 포함해서 열두 명이. 그들은 금세 나를 둘러싸고 어깨를 눌러 바닥에 꿇어앉혔어. 그들은 카이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대신 눈빛들이 험악했어.


- 카이.


20대 후반에 선택된 듯한 뱀피라가 카이에게 말했어.


- 그에게 한 말이 진심이에요?


- 셴.


카이가 짧게 말했지.


-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 이미 알고 있었어요, 카이. 이러려고 우리를 모은 겁니까? 이렇게 끝나려고 카이를 만든 거예요? 카이가 없이는 우린 영원히 살인자로 살아야 해요!


- 알고 있어. 하지만 영원히 이 상태로 지낼 수는 없어.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해.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말이야.


- 그럴 수 없어요.


- 내가 가르친 대로 하면 피에 대한 욕구는 억제할 수 있어. 그를 놔줘.


- 안 돼요. 사람을 죽일 거예요.


- 셴. 받아들여. 할 수 없어. 그는 그대로 살아갈 거야. 그는 적어도 무분별하지는 않아. 피를 즐기는 살인자는 아니야.


- 우리들의 ‘생부’처럼 말입니까? 살인은 모두 똑같아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셴이라고 불린 뱀파이어는 내게 시선을 돌렸어.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린 채 양 팔을 잡힌 채 어깨가 눌려져 전혀 일어설 수 없었어. 손들은 하나같이 시체처럼 차가웠지.


셴이 말했네.


- 당신 말에 책임을 져요. 당신이 그를 죽여요.


- 그럴 수 없어. 카이는 이제 없어. 이제 그만둬.

- 카이! 도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우릴.....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것은 마니의 목소리였어. 마니는 양 팔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얼굴이 울음 직전으로 일그러져 있었어.


-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그러려면.... 우린 절대 흩어질 수 없어요.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흘렀어. 나는 마니의 입술을 바라보면서 부디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진실이 아니길 미친 듯이 신에게, 신이라니 웃기지만 아무튼 빌기 시작했어.

- 너희들이 나를 아버지로 여긴다면 한 가지만 해. 그를 해치지 말고 지금 흩어져. 더 이상 너희들이 하는 짓을 내버려 둘 수 없어. 내가 가르친 짓이지만 차라리 살인을 해. 그건 근친상간보다도 못한 짓이야.


-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쳤어요, 카이.


셴이 말했어.


- 당신을 죽이진 않겠지만 지금 여기서 그를 죽이죠. 마니, 방문을 닫아. 카이를 나가지 못하게 해.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필사적으로 비틀기 시작했어. 그들이 나를 향해 입술을 벌리자 내 일족의 표식인 빛나는 송곳니가 보였고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머리를 흔들면서 반항했지.


- 카이! 카이! 제발! 그만두게 해! 제발!


- 머릴 잡아.


즉시 몇 개의 차가운 손이 머리를 붙잡고 목덜미를 노출시켰어. 이미 팔의 피부를 뚫기 시작한 이빨을 느끼자 공포 때문에 정신이 거의 혼미해질 지경이었어. 그 순간에 바로 깨달았지. 뱀파이어를 뱀파이어로 죽이는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흡혈로 껍질만 남겨놓는 거라는 걸. 난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고 몸부림쳤지만 그렇게 해서 풀려날 리는 전혀 없었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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