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을 때는 항상 불을 꺼두나요?
조명이 켜진 방 안은 환하고 따뜻했다.
조명이 필요 없으니까.
그가 대답했다.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나 보죠?
그렇지. 마치 동물들처럼. 처음엔 거울을 보고 놀란 적도 있었지. 고양이처럼 내 눈이 빛나더군. 오래전 얘기지만... 그리고 난 시간 감각이 없으니까, 이 정도 혼자 이야기하다 보면 상대방이 뭔가 필요할 때쯤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것도 느끼지 못해.
상관없어요. 다 챙겨 왔으니까. 내가 앞에서 뭘 먹고 마시든 신경 쓰지 말고 말씀하세요.
이명은 가방을 끌어올려 안에서 생수통과 녹음기를 꺼내 작동시킬 준비를 했다.
녹음할 셈인가?
네.
그는 장치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를 할 마음을 낸 이유는 딱 한 가지야. 알고 있지?
제가 소설가기 때문이죠.
맞아. 난 작가들을 많이 봐왔지. 엉뚱한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그러면서도 왜곡되지 않게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유능한 소설가뿐이야. 누군가가 내 존재를 말하고 퍼뜨린다고 치면 타블로이드 신문 기사거리밖에 안 되지. 하지만 자넨 꽤 이름 있는 소설 가니까 잘할 수 있겠지.
이전에 작가들을 많이 봤다고요?
그래.
어떤 사람들이죠?
대부분 지망생들이었지만 개중엔 네가 알 만한 사람도 좀 있었지. 멋진 존재들이야. 전부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 인생에서 진실하려고 몸부림치는 순간을 되도록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거든. 모든 예술가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지만 내가 소설가들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정신 노동량이 특히 극심하기 때문이야. 같은 맥락에서 만화가들도 좋아해. 격무 면에서는 소설가들보다도 더 고생하니까. 그건 그렇고, 네가 듣고 싶어 하는 얘긴 뭐지?
글쎄요, 사람 사는 이야기는 다 똑같으니까 말이죠. 난 심심찮게 평론가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이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평론가나, 독자들과의 소통이 마치 건성으로 하는 섹스 같아요. 난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말이죠. 아마 내가 재능이 없기 때문이겠지만요. 그래서 한동안 붓에서 손을 뗐죠. 다른 일을 했어요. 작가들 중엔 글을 안 쓰면 죽을병 걸리는 사람도 많다던데 난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게 재능이 없다는 증거일지도 모르죠.
조용해진 공기가 흘렀다.
난 뱀파이어네.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것뿐인가요?
더 필요하나?
예를 들어... 처음부터 뱀파이어가 되는 건 아니라면서요?
물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뱀파이어로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뱀파이어가 되는 건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아.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요?
무슨 영화?
뭐.... 드라큘라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같은 영화죠. 보셨어요?
물론 봤지. 재미있게 봤지만 그런 영화들은 역시 인간이 만든 영화야. 우릴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슬레이어도 봤지. 그건 뱀파이어를 아주 식인 맹수처럼 묘사했던데. 사실 그런 면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 폭력성은 인간에게도 있지 않나? 사람이 그렇게 설치고 다니면 경찰이 가만 놔두지 않는 것처럼 뱀파이어 중에도 그렇게 휘젓고 다니는 놈은 없어. 그랬다가는 일족들에게 잡혀 죽으니까.
서로 일족이라고 부르나요?
편하게 그렇게 부르지. 같은 혈통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면 당신은 뱀파이어란 얘긴데, 아니 뱀파이어인데.... 그럼 피를 마시나요?
물론 마시지. 네가 알고 있는 거의 그대로야. 뱀파이어는 불사의 몸에다, 사람을 죽이고 피를 마셔.
그럼 당신은 살인자인 거로군요.
그래. 죽일 수 있고 죽인 적도 많아.
이명의 입술에서 살며시 물기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가 웃었다.
적어도 진지하게는 받아들여서 기뻐. 진지하게 들어야 나도 편하게 얘길 할 수 있을 테지. 뭐, 믿든 믿지 않는 결과적으로는 난 상관없어. 물 좀 마시겠나?
좋아요.
이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룸에 딸린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는 음식을 조리한 흔적은 없었지만 방금 물로 닦아낸 듯 습기가 있었고 냉장고에는 일부로 사 온 듯한 에비앙이 있었다. 의자에 앉자 그는 시키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내게 살인을 그만두라고 한 친구도 많아.
사람이었나요?
아니. 뱀파이어였어. 나보다 몇십 살은 더 먹었는데 그는 살인을 죄라고 했지.
당신은 아니라고 했나요?
살인이 죄가 아니라고 대답했냐고? 난 아무 생각 없이 죽이는 미친 존재가 아니라고 대답했지. 내게 인간은 중요한 존재야.
어쨌든 살인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아요.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얘길 할 수 없어.
난 살인의 보편적인 개념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는 물 잔에 손가락을 넣다가 웃었다.
아까 영화 얘길 했지? 우릴 그린, 아니 적어도 우리와 비슷한 존재를 그린 영화들. 그건 다 거짓말이야. 영화의 소재일 뿐이지 그들은 뱀파이어를 갖고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 욕망이라든지 하는 것들. 아까 살인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 얘길 했었지? 내가 너와 같은 사람, 아니면 단순한 먹이사슬 꼭대기의 포식자라고만 볼 때만 나오는 거야. 넌 내가 그냥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라고 생각해? 이 세상에 나만큼, 나와 같은 존재만큼 삶을 골수에 파고들만큼 잘 아는 존재는 없어. 그렇지 않다면 난 홍콩에 있는 그 친구처럼 살았을 거지만 난 그러지 않아. 난 스물일곱 살에 죽었어. 스물일곱에! 그 뒤로 내게는 삶이란 게 없어. 난 어쩔 수 없이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을 갈망하지. 그것이 내 존재 이유야. 난 인간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죽음을 줘. 일방적으로 빼앗는 것이 아니야. 날 비난하려면 인간에게, 아니 살아있는 모든 것에 필연적으로 죽음을 부여한 신을 비난해야 해.
그래서 당신은 신과 같은 존재란 말인가요?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먹고살기 위해 다른 존재를 죽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 하지만 인간이 죽이는 모든 생명체가 단지 생존 때문에 죽는 건가? 털가죽 때문에 죽고, 실험용으로 죽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죽기도 하지. 인간과 내가 다른 점은 서로 죽인다 해도 난 인간이란 존재를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거야. 하지만 뱀파이어 헌터들이 흡혈귀를 좋아한다는 말은 못 들어 봤어. 그런 건 본 적도 없지만.
그래서요?
그래서요? 넌 날 무슨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냥 살인자라면 넌 내 얘길 들을 이유가 없잖아. 왜냐하면 너도 나한테 잡혀 먹힐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넌 소설 가고, 내게서 뭔가 보려고 하고 있어. 무언가 얻으려고. 내가 그냥 신이 저질러 놓은 정교하고도 멍청한 실수이자 미친 살인자라면 넌 벌써 죽었어. 나도 언젠가 살인이 지겨워질지도 몰라. 더 이상 죽이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살인을 포기한다는 건 더 이상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탐내지도 않는다는 것과 같아. 그 순간 난 존재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지.
말도 안 돼요.
이명, 잘 들어. 모든 뱀파이어가 그렇다는 건 아냐. 뱀파이어는 절반은 인간으로 봐도 무방해. 전엔 인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뱀피라지만 단 한 번도 살인을 하지 않은 친구들도 많아. 하지만 그런 일족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어. 뱀파이어에게 살인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섹스와 같아. 절제와 인내를 통해 안 하는 건 가능해. 하지만 하고 싶은데도 못하면 사람이 이상해지듯이 뱀파이어도 피를 못 마시면 갈증에 시달리게 돼. 더 간단한 예를 들까? 사람이 동물을 학살한다고 해서 사람과 동물이 친구가 못 될 건 없잖아? 서로 해치지 않는다는 약속만 한다면. 이래도 내가 두렵나?
이명이 일어섰다.
갈래요.
포기하는군.
그런 것 같아요.
그런가?
좀 생각해보겠어요. 테이프 살 돈도 없고,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고....
좋을 대로.
하지만 이건 물어보고 싶어요.
뭔가?
나를 죽일 수 있어요?
한참 이명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너와 더 이상 얘기를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그때 널 죽일 거야.
이명은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는 조명을 껐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가 문을 열고 이명을 맞았다.
자네가 가고 나서 또 한 녀석에게 엉뚱한 소리나 지껄였다고 후회하고 있었네.
내가 다시 온 건 그만큼 내가 할 일 없는 놈이란 뜻이죠.
앉게. 물 마시겠나?
이명은 테이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르겠어요. 좀 주세요.... 사실 당신은 뭐 그런 살인자로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다시 온 거겠지만.
자네 세대 머릿속엔 살인자라면 미국 하류층 시리얼 킬러 이미지가 박혀 있어서 그래.
잠잠한 집안에서 생수를 따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글쎄요. 출판사에서 오늘 인세를 받았어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책이 다음 판을 찍어야 돈을 받을 수 있거든요.
써지지 않나?
쓰고 싶지도 않아요.
언제부터 글을 쓴 거지?
햇수로 7년이죠. 슬럼프에 빠진 지는 1년이 넘었고. 너무 길죠. 당신은 세상이 끝장날 때까지 살 수 있다고 했으니까, 나 같은 작가들을 많이 봤겠죠?
그가 물컵을 들고 나와 이명과 마주 앉았다.
많이 봤지. 일부러 사귀기도 했고.
다 형편없죠?
내가 예술가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만큼 애처로운 존재도 드물기 때문이야. 그들은 살려고 몸부림치지.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진실하고 더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빼앗아버릴 수 있는 제한된 시간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야. 그 시간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사랑하고 괴로워하지.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야. 그래서 아주 가끔 그들을 죽일 때도 있어. 그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 내 피로 느끼고 싶어서.
그러면 갈증이 풀어지나요?
전혀. 다만 내가 살인자라는 사실만 확실해지지.
그는 말하면서 상대의 안색을 흘깃 살폈다. 이명은 손을 마주 깍지 끼고 꽉 쥐었다 풀었다 하다가 손가락을 꺾어 관절 소리를 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어 테이프가 꽂힌 녹음기를 끄집어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물어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있나요?
말하려고 했는데, 먼저 물어봐 줘서 고마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떤 경로를 밟아 이런 존재가 되었는지는 묻지 말아 주게. 그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질문당하고 싶지 않거든.
알겠어요.
이명은 녹음기를 천천히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이제 켜도 될까요?
그래.
녹음기의 스위치를 누르자 가벼운 금속 마찰음과 함께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앉아 그 작은 기계를 내려다보았다. 은은한 조명 아래서 티 하나 없이 매끈한 그의 얼굴은 약간의 부드러운 명암을 띠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다섯에서 서른 사이로 보였지만 들여다보면 아직 소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키는 이명을 내려다볼 정도로 훤칠했지만 정작 몸과 어깨는 가늘어 실제보다 몸이 작아 보였다.
그가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믿기지 않나?
사실 그래요.
이전에는 이런 걸 당연히 믿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자네가 이제부터 녹음을 토대로 쓸 소설에는 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거야. 개연성이라던가? 아무리 허구로 쓰인다고 해도 독자가 납득하고 몰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낮에 햇빛을 차단해놓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 것 같아? 책 말고는 별로 없어.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요? 거짓말해도 상관없어요.
그건 의미가 없어.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명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1825년이라고만 말해두지. 그 이상은 말해도 모를 테니까. 난 동경에 있었고, 전에 말했듯이 스물일곱이었고, 거기서 선택을 당했네.
선택한 것이 아니고요?
정확하게는 나도 잘 몰라. 그때의 상황은 자네가 내게 생명을 주겠다고 매달려도 얘기해주진 않겠지만, 어쨌든 묵시적인 합의 비슷한 것은 존재했어. 겉으로는 일방적으로 선택당했지만 내부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싶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까. 운명이라고 해도 좋고, 거기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네.
그렇게 이해를 하죠.
그래. 그건 먼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는 잠시 일어서서 녹음기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만약 당신이 살육을 해치우고 나서 은신처로 돌아와 모든 원망의 흔적과 핏자국을 씻어 내리고 차 한잔을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서 육체의 피곤을 다스린 다음, 수면을 취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침대로 향하다가 문득 벽의 거울을 바라본다고 생각해 봐. 거울 속에 이제까지 내가 죽인 모든 사람들이 서 있지. 그들이 한데 뭉쳐서. 처음에 난 사냥감의 눈을 잘 보지 못했어. 사람들의 피를 빨 때마다 반응은 각각 다르지. 취해서 쓰러져 있던 한 남자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내 팔 안에서 어린애처럼 늘어지고, 어떤 여자는 필사적으로 심장의 펌프질을 계속함으로 끝까지 저항하지. 한 소녀는 아빠에게 안긴 것처럼 내게 안겨버리지. 애를 그대로 안고 집까지 와버린 적도 있어. 그렇게 죽은 모든 사람들이 거울 속에 모두 있는 거야. 거울 속에서 그들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 아니야. 그 사자들이 한데 모여 내 몸을 이루고 있는 거지. 이미 살인자는 스스로의 자아를 그들에게 빼앗겨 버린 지 오래지. 그래서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진짜 내가 하는 것이 아니야. 내 안에서 차갑게 식은 피의 원래 주인들이 이야기하는 거지.
그는 등을 기대고 이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욕망하는 것으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사람이라면 나는 이 세상에 진실로 존재하는 단 한 명의 인간인 셈이야.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뿐이니까.
당신은 스물일곱 이후로 나이를 전혀 먹지 않은 것 같군요. 아무리 육체가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정신은 변해가기 마련인데.
그건 당신이 잘못 본 거야. 이명. 나이를 먹지 않는다니. 난 늙어가고 있어. 확실히. 불사의 몸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할 거야. 몇 시지?
자정입니다.
시간이 없군.
그는 다시 녹음기를 쳐다보았다.
비교적 최근 이야기를 할까? 솔직히 난 연대를 잘 기억하진 못해. 영원의 시간을 갖게 되면 시간 감각이 확실히 인간이었을 때와 틀릴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나와 같은 종류의 일족이 자연계에 포함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어떤 존재건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 단계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 언젠지는 확실히 기억은 못하겠어. 변화를 겪은 뒤-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내게 편할 것 같군-나는 시간 감각을 거의 잃었으니까. 대개 사람들은 해가 기우는 것을 보고 몇 시가 됐는지 가늠하는데, 난 낮에 나가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햇빛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냐. 그건 날 없애지도 다치게 하지도 못해. 다만 살인을 하려면 밤에 하는 것이 훨씬 좋기 때문에 낮에 잘 다니지 않을 뿐이야. 하긴 살인자가 햇빛을 좋아할 리가 없지 않나?
10년쯤 전이라고 말해두지. 난 홍콩에 있었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이었으니까, 언젠지는 대충 알겠지. 동양의 진주라는 사치스러운 별명이 정말 걸맞은 곳이지. 가본 적이 있나?
아뇨.
번 가봐. 중국에 넘어가고 나서는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 솔직히 많이 변했을까 봐 겁도 나고. 하지만 정말 매혹적인 도시지. 네온사인은 불꽃처럼 작열하고, 공기에서는 유혹적인 냄새가 나고, 바다는 호수처럼 찰랑거리고.
바다가 호수처럼 찰랑거려요?
홍콩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 본토에 붙어 있는 반도와 문자 그대로 홍콩 아일랜드로. 내가 말하는 바다는 그 사이 해협을 얘기하는 거야. 유람선으로 15분만 타면 바로 건널 수 있어. 물론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지. 진짜 홍콩에 사는 사람들은 해저 터널로 다니거든. 아무튼 아주 좁은 바다야. 그래서 파도도 없고, 바람이 불면 호수처럼 넘실거리지.
야경이 좋기 때문에 난 주로 밤에 돌아다녔어. 홍콩은 오래전 시내에 공항이 있기 때문에 불빛이 깜박거리기라도 하면 이착륙할 때 혼란이 온다더군. 그래서 네온사인들이 다 깜박이질 않아. 그대로 빛을 낼 뿐이지. 밤하늘 아래 네온사인들이 출렁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마치 빛의 바다에 빠진 기분이 든다네.
아마 그래서 그날 그랬는지도 몰라. 자정이 가까워서야 난 내 육체의 요구에 순응하러 나왔고, 힘들이지 않고 평소처럼 사람을 죽였지. 포르노 잡지를 팔던 노인이 그날의 희생물이었어. 노인들을 죽이는 것이 젊은이들을 죽이는 것보다야 쉬운 것이 사실이야. 물론 힘도 덜 들지만 인생을 이미 많이 누린 존재기 때문에 그래. 바싹 야윈 몸을 붙잡으면 대부분 그들은 자신이 지금 죽음의 신이 데리러 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큰 저항이 없지. 7 ,80년 동안 지구 상에 삶을 영위하다 보면 나 같은 존재도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게 되는 거야. 여기선 흔히 연쇄살인자들이 느끼는 살인의 쾌감, 한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빼앗았다는 정복감, 신이 된 듯한 느낌은 이미 배제되어 있어. 다만 나는 내 존재를 연장시키는 에너지를 대가로 그들에게 편안하고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할 뿐이니까. 젊은 사람들은 달라. 끝까지 저항하고 물리적인 통증과는 관계없이 아주 고통스럽게 죽어 가지. 그 저항은 물론 매력적이지만.
신문과 잡지를 파는 노인이 내 팔 안에서 이제까지 죽은 사람들처럼 천천히 몸을 늘어뜨릴 무렵 내 등에 똑바로 꽂히는 시선을 느꼈지. 하지만 난 그다지 놀라지도 멈추지도 않았어. 어쩌다 살인하는 장면을 보인 적은 많았지만 대부분 실신한 줄 알거든. 노인은 절명 직전이었고, 난 끝내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평범한 시선이 아니었지. 내가 무슨 존재인지 명확히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 시선이었어.
그걸 느낀 순간 갑자기 팔의 힘이 공기가 빠지듯 확 풀려버리면서 노인을 떨어뜨렸지. 그걸 느끼지도 못했어. 내가 물건을 훔치다 결정적인 장면을 들킨 아이처럼 고개를 홱 돌리자 상대는 재빨리 사라져 버렸어. 난 노인을 내버려 둔 채 그를 미친 듯이 쫓아갔지. 쫓아가면서도 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아마 변화를 겪은 지 얼마 안 되어 나이 먹은 날 보고 겁먹고 도망치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