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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Jul 04. 2021

[청소년 단편소설] 열네 살(2)

연수도 덧붙였다. 


“친구도 없나 본데.”


“나온다. 가자.”


경진이 말했다. 그러나 앞장서는 사람은 현주였다. 희정이 교실 뒷문을 빠져나와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경진이 다가가려 하자 현주가 막았다. 네 명은 동물을 쫓는 사냥꾼들처럼 살금살금 따라갔다. 학교 건물을 빠져나와 운동장에 이르자 현주가 연수에게 말했다.


“지금이다. 가서 잡아.”


연수는 희정에게 달려가면서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희정이 돌아서더니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멈춰 섰다. 현주는 따라오는 아이들을 거느리듯이 그녀에게 걸어갔다. 현주가 희정 앞에 서자 연수는 잽싸게 무리 안으로 몸을 숨겼다. 현주가 말했다.


“잠깐 우리 좀 봐.”


희정은 고개만 약간 끄덕였다. 경진이 말했다.


“네가 뭐 잘못한 건 아니지만, 책임져줘야 할 일이 있어.”


“뭔데.”


희정이 말했다. 코 먹은 둔중한 목소리를 듣자 더 멍청해 보였다. 


“매점에 일하는 그 소사 아저씨, 네 아빠지?”


희정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경진이 다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안 들려, 답답해.”


현주가 손을 들었다.


“너네 아빠, 맨날 여자애들 손목 만지고, 얼굴 만지고 그런 거 너도 알지? 오늘도 나랑 내 친구 매점 갔다가 또 그랬어. 우리 이게 되게 문제 있다고 생각해. 안 그래? 네 아빠 아직 집에 안 갔으니까, 너랑 같이 가서 말하려고 해. 지금 시간 있지?”


희정은 대답 대신 늘어뜨린 두 손을 들어 교복 주머니에 꽂았다. 


"매점 아저씨 말하는 거야?"


현주가 대답했다.


"그래, 너네 아빠. 매점 아저씨."


희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독백하듯 천천히 말했다.


"너희들이 나랑 가서, 말한다고?"


"그래. 너도 네 아빠 그런 거 알지?"


희정은 한숨을 쉬고 팔을 양쪽으로 덜렁 늘어뜨렸다.


"내가 너희들하고 그 사람한테 같이 가 주면, 너넨 나한테 뭐 해 줄래?"


현주가 멈칫했다. 그러나 경진이 유미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 친구 없지? 얘가 너한테 숙제도 보여주고 같이 놀아 줄 거야."


희정이 유미를 쳐다보았다. 유미는 입을 딱 벌렸다. 기가 막혀 아래턱이 빠진다더니 딱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현주는 피식 웃었다.


“데리고 가.”


경진과 연수가 희정을 둘러쌌고 유미가 뒤를 따랐다. 현주는 희정을 앞장 세웠다. 


매점은 운동장 맨 안쪽 가건물이었다. 업자를 아직 정하지 못한 터라 몇 가지 음료수와 과자, 컵라면만 겨우 갖다 놓고 소사 아저씨들이 아이들에게 물건을 팔고 있었다. 밤에는 소사 아저씨들의 숙직실로 쓰이는 매점은 언제나 어둡고 너저분했다. 아이들이 들어선 매점은 형광등 두 개만 겨우 켜져 침침했다. 매캐한 먼지 냄새도 났다. 경진이 코를 찡그렸다. 현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매점 안이 초라할수록 현주의 또렷한 미모는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본 한 아저씨가 계산대 뒤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지금은 물건 안 판다. 아, 희정이 친구들이야? 우유 줄까?”


“오늘 점심시간에 저희한테 우유 판 아저씨 찾는데요.”


연수가 말했다.


“점심시간에? 그럼 김 씬데. 기다려봐. 딸 친구들 왔다고...”


아저씨는 종이 박스가 쌓여 있는 뒤편으로 사라졌다. 경진이 쫑알거렸다.


“친구 아닌데요.”


낮잠이라도 자고 있었던 모양인지 몇 분이나 지나 김 씨라고 불린 아저씨가 나타났다. 잠이 덜 깬 듯 벌게진 눈동자에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어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와 군용 바지에 담뱃진이 밴 모양인지 사방에 연초 냄새가 났다. 쉰 목소리로 김 씨가 말했다.


“친구들이냐.”


경진이 튕기듯 대답했다.


“친구 아닌데요.”


현주가 말했다.


“저희. 얘기할 게 있어서 왔어요. 아니, 아저씨 앞에서 얘기할 게 있어서 왔어요.”


현주는 에워싸여 있던 희정의 팔을 잡고 끌어내어 계산대 앞에 세웠다.


“아까 우리가 얘기한 거 들었지? 네 아빠가 맨날 손목 잡고, 얼굴 만지고 치마 속 들여다보고, 그런 거 너무 짜증 난다고. 네가 앞에서 얘기해.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말해. 여기서 약속을 받아야 집으로 갈 거야. 여기서 네 입으로 말 안 하면, 지금 우리 당장 집으로 가서 부모님한테 우리 다 네 아빠한테 강간당했다고 얘기할 거야.”


매점 안에는 카랑카랑한 현주의 목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유미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꿈이 아니다. 꿈이기는커녕 아주 재미있다. 계산대 뒤에 서 있는 김 씨의 표정은 마치 그녀의 바지에 손을 집어넣다가 숯불을 만진 듯 놀라던 그 고등학생 같았다. 그 옆에 서 있는 아저씨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현주는 희정의 팔을 놓고 그 대신 김 씨를 쏘아보았다. 크고 새까맣고 싸늘한 눈에 담긴 표독한 표정이다. 현주는 가끔 그런 눈빛을 선생들에게 보였다가 따귀를 얻어맞았다. 그러면 애들은 애가 예뻐서 더 때렸을 거라고 위로했다. 여기서 현주가 만일 맞기라도 한다면 참지 못할 것 같다고 유미는 느꼈다.


희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주의 한 옥타브 올라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매점을 울렸다. 


“말 못 하겠어? 그럼 내가 하는 말 따라 해. 빨리 대답 안 하면 우리 지금 엄마 아빠 선생님한테 다 가서 네 아빠한테 강간당했다고 말할 거라니까. 빨리 대답해.”


희정의 시선은 김 씨 아저씨에게 가서 닿았다. 유미는 너무 심장이 뛰어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맥박이 고동치는 소리가 머릿속에 쿵, 쿵 울렸다. 


매점에 서 있던 아저씨가 계산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너희들 너무한 거 아니냐. 화난 건 알겠지만... 얘들아, 그래도 같은 반 애들인데, 이렇게 끌고 와서 얘기해도 되겠니?”


“같은 반 아닌데요.”


경진이 또 한 번 튕겼다. 현주가 빠르게 오금을 박았다.


“저희는요, 다음부터 안 그러겠다는 약속만 받으면 바로 갈 거예요. 너 빨리 대답해. 말할 거야 안 할 거야?”


경진이도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야, 너 말 안 하면 네 아빠 이상한 짓 하고 다녔다고 다 떠벌린다니까. 학교랑 너 사는 동네에 소문 퍼뜨리고 다닐 거라니까. 그럼 너 학교도 학원도 못 다녀. 그러니까 말 안 해?”


두 아저씨는 멍청하게 서 있었다. 어른도 아닌 것 같았다. 매점에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물건처럼 두 아저씨가 서 있었다. 유미는 무서우면서도 들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점점 속력이 빨라지면서 높이 올라가면서 느껴지는 이상한 쾌감 같았다. 재미있다!


희정이 매점에 들어선 지 처음으로 말했다.


“너희들 맘대로 해.”


“뭐라고?”


경진이 바락 소리쳤다. 희정이 둔중하게 대답했다.


“너희들 맘대로 하라고.”


유미는 희정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할 줄 알았는데, 희정은 의외로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유미는 놀랐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무심할 수가 있나. 현주 말마따나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경진이 휴대폰을 가방에서 끄집어내며 소리 질렀다.


“야! 가자, 가. 진짜 말 안 통하네. 엄마한테 전화할 거야. 빨랑 학교로 튀어오라고. 야, 우리 다 전화해. 나 이따위 학교 못 다녀!”


말이 별로 없던 연수도 화가 났는지 주머니를 뒤적이며 휴대폰을 찾았다. 유미도 화가 좀 나서 가방 뒷주머니를 뒤적이는 시늉을 했다. 현주는 말없이 희정의 옆얼굴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계산대 뒤에 있던 김 씨가 어정어정 걸어 나왔다. 유미는 흠칫했다. 그러나 김 씨의 목표는 현주네가 아니었다. 김 씨는 두껍고 먼지 묻은 손을 들어 희정의 뺨을 후려갈겼다. 


“퍽!”


짝! 하는 가벼운 소리 대신 담벼락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희정의 뺨은 단번에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입술도 약간 터진 것 같았다. 김 씨는 한 대에 그치지 않고 희정의 다른 쪽 뺨도 가차 없이 내리쳤다. 매점에 퍽, 퍽하는 소리가 울렸다. 유미는 저도 모르게 현주 뒤에 슬금슬금 숨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경진과 연수도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현주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희정이 얻어맞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같이 있던 아저씨가 다가와 김 씨의 팔을 움켜잡을 때까지 따귀 때리기는 계속되었다.


“애를 왜 패, 그만해!”


김 씨는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엉뚱하게 두 아저씨의 몸싸움으로 번졌다. 김 씨 팔을 움켜잡은 아저씨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너희들 빨리 가! 집에 가!”


뭐야, 이대로 끝나는 거야? 유미는 갑자기 실망감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다신 안 그러겠다는 약속이라도 받아야 되는 거 아닌가. 희정이 맞은 건 불쌍하지만 그래도 누구 때문에 온 건데. 


그때였다. 그 이후 유미는 영원히 현주를 존경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현주가 똑바로 걸어가더니 희정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너 빨리 말해! 말하라고! 말 안 하면 우리 안 가!”


서로 팔을 잡고 힘 겨루던 두 아저씨가 움찔하고 동작을 멈췄다. 희정의 부어오른 양 뺨에 눈물이 두 줄기 주르르 흘러내렸다. 


눈물을 본 현주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따라 해. 따라 하라고. 자, 아빠.”


“... 아빠.”


희정은 부어 터진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현주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거 똑같이 따라 해. 다음부터 여자애들 손목이랑 얼굴 만지지 마세요. 여자애들 지나가면 무조건 멀리 가버리세요. 여기 있는 애들한테 잘못했다고 사과하세요.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현주의 말을 희정은 웅얼거렸지만 어쨌든 따라 했다. 


경진은 찬탄하며 현주를 바라보았고, 연수는 아직 겁을 먹고 어느새 유미 등 뒤에 숨어 있었다. 유미는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공부를 잘해도 현주를 따라갈 수 없다고.


희정의 말이 끝나자 현주는 시선을 김 씨에게 돌렸다.


“들었죠? 빨리 대답해요.”


현주를 포함한 네 명의 여자애들은 김 씨를 쏘아보았다. 김 씨는 팔을 늘어뜨리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아저씨.”


현주의 차가운 음성이 울렸다.


“희정이 말 들으셨잖아요. 빨리 대답하세요.”


“너희들 정말!”


김 씨와 승강이하던 아저씨가 주먹을 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말꼬리가 흐려지면서 목소리가 잦아들고 말았다. 유미는 반사적으로 아저씨에게 눈을 돌려, 제발, 이라는 눈짓을 했다. 그게 먹혀들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아저씨는 손을 내렸다.


저기요, 저기요, 정말 우리는 화나서 그러는 거예요. 그동안 참고 참다가 화나서 그러는 거예요.


김 씨가 내뱉었다.


“알았다.”


경진이 쏘아붙였다.


“뭘요?”


김 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았다고!”


경진이 말했다.


“뭘 알았는데 소리를 질러요? 아씨...”


현주가 희정의 팔을 놓고 손짓으로 경진을 제지했다.


“알았으면 됐어요. 그럼 다음부터 여자애들 근처에도 가지 마세요. 알았죠? 또 그러면 부모님들한테 얘기하는 건 물론이고, 얘도 완전 망가뜨릴 거예요.”


말을 끝내면서 현주는 손으로 등을 툭 치자 희정의 육중한 몸이 움찔 흔들렸다. 


“시끄러워!”


김 씨 아저씨는 소리를 지르면서 박스 뒤편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자.”


현주는 돌아서서 매점을 나왔다. 여자애들은 그녀 뒤를 따랐다. 유미는 그대로 서 있는 희정을 살며시 뒤돌아보고 재빨리 문턱을 넘었다. 


어두웠던 매점 바깥으로 나오자 거짓말처럼 화사한 햇빛이 내리쬐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신선한 공기를 호흡했다. 연수가 팔을 쭉 뻗으면서 웃었다.


“야, 기분 좋다.”


경진도 히히 웃어댔다.


“아 씨발, 다른 아저씨 있어서 말도 제대로 못 했네. 그래도 현주 진짜 멋있지 않냐? 거기서 혼자 말 다 하고. 현주 넌 공부만 잘하면 최고다.”


“시끄러워.”


현주가 나직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감추기 힘든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연수가 말했다.


“야 참. 김희정 걔는 어째.”


“몰라. 그 아저씨도 제 딸이란 생각 있으면 다음부터 그러진 않겠지. 설마 그러겠어? 바로 옆 반인데.”


갑자기 현주가 멈춰 섰다.


“김유미. 지금 가서 매점 좀 들여다보고 와.”


“왜?”


“걔는 이제부터 네가 책임지기로 했잖아. 우린 떡볶이 가게로 갈 테니까 빨랑 가서 뭐 하고 있나 보고 와. 너 먹을 거 남겨놓을 테니 걱정 말고. 끝까지 보고 와서 자세히 말해줘야 돼. 알았지?”


현주는 말을 끝내자마자 유미가 가는 것도 보지 않고 바로 돌아섰다. 다른 아이들도 벌써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빨랑 갔다 와!”


경진이 뒤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유미는 돌팔매 맞은 개처럼 반사적으로 뛰었다. 망할 년, 담부터 숙제 보여주나 봐라. 그러나 보여주지 않을 수단이 없다는 건 유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매점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유미는 매점 문에서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문 밖에 가방이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운동장 흙바닥에 교과서와 공책 따위가 널려 있었다. 필통도 죄다 열려 연필과 지우개 따위가 흩어졌다. 유미는 조심스럽게 문 옆으로 다가가서 몸을 숨겼다. 


매점 안에는 김 씨와 희정이 둘 밖에 없었다. 김 씨가 주머니에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건네고 있었다. 희정은 눈물로 얼룩지고 떨리는 손을 내밀어 지폐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희정은 매점 밖으로 나오자 문 옆에 엉거주춤 서 있던 유미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뱀을 본 것처럼 동시에 멈춰 섰다.


“너, 혹시 더 맞았어?”


유미가 묻자 희정은 울어서 더 부어오른 얼굴을 끄덕였다. 


“네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왜 때려?”


“...... 우리 아빠, 원래 그래.”


희정은 몸을 웅크려 흩어진 물건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풀썩거리며 일었다. 다른 아이들의 교과서보다 훨씬 빛바랜 교과서, 누런색의 낡은 노트, 칠이 벗겨진 연필과 지우개가 차례로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미는 멍하니 희정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물건을 같이 주워줘야 하나. 그렇지만 유미가 희정의 물건을 만지면 싫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줍는 희정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졌다. 왠지 줍는 모습이 평소부터 익숙해 보였다.


희정은 누렇게 묻은 먼지를 털지도 않고 가방을 멨다. 그리고 교문을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유미는 뒤를 따라갔다. 왠지 등 뒤가 으스스했다. 김 씨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뛰어서 도망갈 마음이 나진 않았다. 달려가는 뒷모습을 희정이 지켜보게 하고 싶진 않았다. 


교문을 나오자 길 옆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희정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현주가 끝까지 보고 오라고 했는데. 하지만 현주에게 본 대로 고해바쳐봤자 떡볶이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하라는 대로 다 해도 칭찬은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기도 힘들 것이었다. 그래도 시키는 대로 안 했다가 왕창 욕을 들어먹을 게 뻔했다.


떡볶이 가게 앞에 유미는 멈춰 섰다. 가게 안에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현주네는 없었다. 유미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떡볶이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머릿수건을 쓴 아주머니가 웃어 보였다. 자주 가서 얼굴을 익힌 사이다.


“오늘은 혼자 왔네.”


유미는 한숨을 쉬었다. 현주네는 떡볶이 가게 따윈 가지도 않았다. 유미는 휴대폰을 꺼내 학원 전화번호를 찾았다. 학원 차나 보내달라고 해야겠다. 유미는 휴대폰을 귀에 대면서 돌아섰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희정이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미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달칵하고 그릇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떡볶이 한 접시를 내어준 것이었다.


“얘, 이거 먹어.”


“네? 아, 안 시켰는데요?”


“지금 새로 떡볶이 올려야 돼서 판 비운 거야. 그냥 먹어.”


그러고 보니 배고프다. 유미는 젓가락을 집어 들면서 슬그머니 돌아앉았다. 뒤통수가 가렵다. 매점에서 통쾌하던 기분이 가라앉고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김희정이 선생님한테 말하면 어떡하지? 학교에서 난리가 나겠지. 텔레비전에 나는 거 아닌가 몰라. 엄마 아빠가 알면 무지하게 야단칠 텐데. 아니, 그 아저씨가 만졌다고 하면 야단을 안 맞을지도 몰라. 어쨌든 김희정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말이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유미는 현주가 희정의 입단속을 시키기 위해 자기를 따돌려 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나쁜 년.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다. 유미는 팔다 남은 떡볶이를 하나씩 입에 넣었다. 더웠다. 희정은 어디로 갔는지, 아니면 어둠 속에 묻혀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던 봄날이 생각났다. 고등학생이 사라진 뒤 혼자 고무줄 바지를 추켜올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봄날. 그 봄날이 초여름이 되어 찾아온 것 같았다. 진동으로 해둔 휴대폰이 저 혼자 울리면서 화면에 문자들이 찍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미는 알지 못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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