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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혜윤 Mar 02. 2018

죽은 사회의 시인

#withyou #미투


우리에게 존경받았던 시인은

[천정을 보고 누운 그가 바지 지퍼를 열고 자신의 손으로 아랫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한참 자위를 즐기던 그는 우리를 향해 명령하듯 ‘야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라고 말했다.]고 한다.


괴물에게 존경을 먹여 키운,

우리가 살아온 죽은 세상이었다.



반갑다.


이 시궁창 같은 소식들이 존경스럽다.

상처에도 상처받지 않고 꿋꿋이 자신을 지켜내고 당당한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그들의 용기뿐만 아니라 그 간 홀로 이겨내 왔을 절대 타인은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들까지.


나도, 우리도, 모두가 크고 작게 같은 모양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일들이 많았다.

"내가 잘 웃는 편이라 그런지, 내가 사람을 잘 믿어서 그런지, 내가 눈에 띄는 편인가.. 이런 일도 있었고, 이런 일도 있었어."


'이런 시궁창 같은 세상에,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넘쳐서'라고는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못 했다.

어쩌면 수많은 쓰레기들과 함께 계속 살아가야 할 시궁창을 인정해버리고는

지금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자주 발견하고, 환하게 웃을 수 없을까 봐 그게 더 겁났을 테니까.


변할 것 없을 이 곳에서 나는 나대로 살기 위해 나의 문제로 바꾸어 버리는 편이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겁에 질려 이야기했을 때에는 별난 아이 취급을 받았고,

그 후, 너 치마가 짧지는 않았냐는 물음을 받았고,

수많은 다음이 있었음에도 다음은 없었다.

스스로에게 내가 별난 건지, 내 옷차림이 어땠는지, 내가 허술해 보인 건 없는지 스스로에게 꾸짖어보게 되고,

아주 아주 오래 혼자 소화가 될 때까지 잘 견디고 굳은살이 얹히고 나서야

"내가 잘 웃는 편이라 그런지, 내가 사람을 잘 믿어서 그런지, 내가 눈에 띄는 편인가.. 이런 일도 있었고, 이런 일도 있었어."라고,


위로라도 받고 싶은 때에, 위로라도 해 줄 만한 사람 같아 보일 때에 조심스레 꺼내놓을 수 있었다.

사실 그러고도 제대로 된 위로를 받아 본 일은 없어서, 이렇게 이야기라도 꺼내놓고 나면 무엇인가 내 속에 가둬둔 것들을 덜어 내는 기분이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했던 적이 더 많았다.


존경해 마지않았던 이름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에 배신감이 일었지만,


사실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이미 모두 알고 있었지 않은가.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대단한 일을 발견한 듯 한 반응들이 더 놀라웠다.


멀리에 있지도 않게 매일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 마주하지 않았던가.

어느 하나 당해보지 않은 여자를 찾기가 쉬울 것이고,

누구 하나 가해 보지 않은 남자를 찾기가 어렵지 않은가.


성별이라는 기득을 갖고,

인격이 아닌 대상으로 상대를 유희하고,

본능으로 당연시 여겼던 폭력들을

단 한 번도 망설여 본 적도 없이 마음껏 저지르고, 가담하고, 방관하였는데,

무슨 새삼.


원한 없는 살인이 생겨나고, 사이코 패스라는 단어가 생겨날 때쯤

문학 세미나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야기해 주셨다.

이런 괴물들이 생겨남에 글을 쓰는 사람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그때에 생긴 장래희망.

시인이고 싶었다.

그만큼 위대한 삶이 아니라면 시인처럼 이라도 살고 싶었다.



그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혼자의 일이 아니라고 나 대신 용기 내어 주어 고맙다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당신의 아픔으로 전하게 하여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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