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기고 챙김 받고.
미국에서 매년 5월의 두 번째 일요일은 Mother's Day, 어머니의 날이다. 어머니의 날이 있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날도 있다. 사이좋게 그다음 달인 6월의 3번째 일요일이 Father's Day, 아버지의 날이다. 한국처럼 한꺼번에 하면 편할 텐데 처음 접했을 때는 이것도 상술인가 싶었다.
한국에서 그리고 출산 전까지는 5월의 어버이날이나 미국에서의 어머니날이 되면 한국에 계신 엄마 생각이 자연스레 났다. 물론 양가에 전화도 드리고 매번 같은 레퍼토리로 가까이 있으면 식사라도 할 텐데 죄송해요...라는 말이 돌림노래처럼 쓰였다. 미국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 초반까지는 선물도 드리곤 했는데 아기 낳고 난 후에는 더 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가에 드리던 선물이며 현금들까지 모두 뜸해졌다. 올 해는 특히나 더욱 정신이 없었는데 그래서 어버이날에 시아버지께 전화를 드리지도 못했다. 남편에게 전화 한 번 해보라는 언지를 주긴 했는데 근래에는 엄마 문제로 신경을 거의 쓰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에게만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늘 저녁식사 중에 시집에서 걸려 온 전화를 통해서 남편이 한국에 돈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나에겐 상의 없이 보낸 돈이었다. 전화를 끊은 남편에게 양가에 보냈냐고 물었다. 내가 아는 남편은 한쪽에만 보낼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고마우면서도 미쳐 챙기지 못한 게 미안하여 나온 말이었다. 엄마 문제가 터진 이후로 시집과의 연락은 남편이 전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사하시라고 돈 조금 보냈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병원에 누워 계신 엄마가 생각이 났다. 병원에 계셔서 가족들과 식사는 고사하고 면회도 되지 않을뿐더러 거동이 불편하셔서 거의 병원 병실에만 누워 계신 상황이다. 며칠 전, 언니가 엄마의 전원을 도왔는데 코로나 19 때문에 면회가 불가하여 오랜만에 본 날이었다. 물론 화상통화를 하긴 하지만 그 짧은 통화나 전화기 너머로 엄마 상태를 전부 확인하는 건 무리가 있다. 물론 나도 그렇다. 언니의 말에 의하며 엄마는 이제 혼자 움직이는 건 거의 못 하신다니 조금이라도 나아질 줄 알았던 기대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마음이 심란하다.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하는 영상통화로는 처음 중환자실을 거쳐 준중환자실로 옮기신 후 화색이며 말씀하시는 것도 많이 나아지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지금의 병원을 거쳐 요양병원이 인생의 종착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가까이 살면 , 아니 멀더라도 같은 한국이라도 되면 애 둘 데리고라도 주말에 다녀올 수도 있을 텐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게 불확실하니 이 문제에 있어서는 무기력 해지는 게 사실이다.
엄마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내가 클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 지인들과 있을 때 엄마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웃으며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내가 웃기려고 만든 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 신선했다. 나는 내 친정엄마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적잖은 충격이기도 했다. 결혼 후 남편도 친엄마가 맞냐고 물어본 적이 몇 번 있긴 하다. 엄마라고 무조건 희생하고 양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내 상황을 합리화시켜보려 해도 첫째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키우는 과정에서는 엄마한테 서운한 게 끊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둘째를 낳고 보니 조금 달라졌다. 내 친정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잠시는 괜찮지만 곧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내 친정엄마를 있는 그대로 그냥 바라보게 되었다. 결론은 모든 엄마들이 희생하며 살 필요는 없고 그걸 내 엄마에게 강요할 필요도 없다는 것, 고로 내 엄마는 그냥 저런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랬더니 나도 편안해졌다. 항상은 아니고 대부분의 시간이 그러했다. 즉, 나는 엄마에게 조금은 거리를 두고 살게 되었다.
작년 2월 엄마가 하시던 간병인 일을 그만두셨다. 내 나이 때의 두 아이 엄마를 30대 초중반부터 봐오셨다. 10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입주 간병인으로 생활하시다 권고사직?을 당하셨는데 그 충격이 꽤나 크셨었다. 힘들어서 그만두신다고 말은 몇 번 하셨지만 1-2년은 더 봐주고 나오시겠다고 했던 터였다. 유치원생이던 아이 둘이 중학생이 되었고 어린아이가 곧 중학교에 들어간다 했다. 친정 엄마가 미국에 와 계신 동안에도 그 아이들에게서 영상통화가 몇 번 걸려오곤 했다. 아이들도 친정엄마도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되던 사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미국에서 산후조리를 도와주신 후 한국에 들어가실 때 아이들 선물은 꼭 잊지 않고 챙겨 가셨을 정도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지방의 집을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신 게 2009년. 그 후 계속 서울과 경기도에서 간병인 일을 하셨으니 꼭 10년을 하셨다. 일이 너무 힘드니 다른 일을 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다른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집에만 계실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엄마가 젊은 시절 직장생활을 하시던 서울이긴 하지만 그건 40년도 더 전의 일이었고 2009년 갑작스레 아빠를 보내 드린 후 엄마는 정신없이 일이라도 하고 싶으셨을 테다. 그런데 그 일을 그만두고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70대의 노인은 몸도 마음도 공허했으리라. 뉴스에서만 보던 일을 내 엄마가 그대로 하고 있었다. 동네 노인들 모아다가 노래도 틀어드리고 말동무도 해 드린다는 명목 하에 환심을 사고 그 길로 엄마는 몇십만 원짜리 이불을 집에 가져오셨단다. 그것도 외상으로. 몇만 원도 아까워 보이는 그런 이불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점점 몸이 안 좋아진다고 하셨지만 워낙에 많은 약을 복용하고 계셨던 터라 수면제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몸을 끔찍하게 챙기시고 약도 좋아하시는 분이라 다른 것을 의심하지 못했다. 매일 하던 카톡도 그렇고 갑자기 사진 보내는 방법이나 내가 보내드린 영상을 보는 방법을 잊었다는 그때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가끔 동생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혼자서는 어려운 텔레비전 작동법도 문제 없이 하시다가 유독 동생이 있으면 못 하는 척을 하시며 도움을 요청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다. 팔다리에 힘이 갑자기 없다는 말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재작년 가을부터 한 달에 몇 십 만원 하는 돈을 지불하며 허벌라이프에서 살 빼는 약을 드셨다고 했다. 당뇨도 있는 분이 식사도 안 하시고 그곳에서 제공하는 단백질과 미숫가루 같은 걸 드시면서 빼신다길래 당뇨 있는 70대 노인이시니 하지 마시라고 했지만 앞에서만 약속하시고 결국 몇 달을 더 그렇게 드시고 살이 급격히 빠지면서 다리의 근육량이 거의 바닥이었다. 그래서 팔다리에 힘이 없는 줄 알았다. 이 모든 것이 파킨슨 병의 시작인 줄을 몰랐다.
한국 나이로 6살, 3살 아이 둘과 함께 보내는 엄마의 날에 나는, 2년 전 둘째를 봐주러 온 엄마의 조금은 낯선 행동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작년 가을 한국에 갔을 때 엄마의 잠꼬대며 불면증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올 초 다리에 힘이 없다며 거의 누워만 계시던 엄마의 목소리게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조금 더 빨리 엄마의 병을 알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을 하며 보내고 있다. 첫째와 둘째 산후조리 때 번듯하게 여행 한 번 못 하시고 가셨던 터라 엄마가 일을 그만두시면 미국에 여행하러 오시라고 말씀드렸었는데 그 약속은 기약이 없게 되어버렸다. 나의 20개월짜리 둘째와 마흔을 넘긴 나 그리고 70을 훌쩍 넘기신 친정 엄마를 보면서 사람 인생 별 거 없구나 싶어 헛헛한 마음 달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