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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혜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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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쓰다 Dec 15. 2019

'안'보다는 '못'에 가까운 이야기:바야흐로 김장철

♬김치 없이 잘 살아 정말 잘살아 hey!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선생님은 내 식판에 음식을 담아주면서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미신 내지는 설화인데, 당시 어린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 말은 바로 '음식을 남기면 죽어서 그 음식을 한데 모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편식을 다그치지 않고 내 의사를 존중해주었던 엄마 덕분에 나는 그때까지 김치를 먹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유치원을 다니며 처음으로 김치를 먹었다. 김치를 씹는 순간 토악질을 했다. 물컹하면서도 어딘가 아삭한 식감, 쿰쿰한 젓갈 냄새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선생님은 김치를 먹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내 발을 저지하고 나의 입속으로 김치를 욱여넣었다. 죽고 나면 어딘지도 모를 그곳에서 그 음식들을 다 먹어야 한다는 협박과 함께. 유치원생 때 찍었던 사진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괴롭다. 그래서 사진들을 서랍 속에 구겨 넣었고, 지금은 그것을 절대 보지 않는다. 여전히 익은 김치 냄새에 오심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나, 김치찌개와 같이 조리된 김치는 이제 겨우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분명한 사실은 생김치를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 사랑보다 멀지만 우정보다는 가까운 아는 오빠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갔다. 나는 김치를 못 먹는 것의 연장선으로써 피클이나 단무지를 먹지 못한다. (시도를 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발효 식품류 전부를 못 먹는 듯하다). 그래서 그 오빠가 피클을 우적우적 씹는 모습을 보는 순간 식욕이 떨어짐과 동시에 속이 울렁거렸다. 왜 피클을 먹지 않냐는 오빠의 물음에 상냥해 보이고 싶어서 "안 먹어봤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오빠의 안색이 변했다.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당시의 나는 학습된 '을'이었고, 낭패감 감추는 법을 너무도 잘 아는 보편적인 '여자'였다. 내 피클 첫 경험을 앗아가고 싶었던 그 오빠는 내게 피클을 강권했다. 수제 피클이라 시지 않다며 먹여주려는 것을 제지하고 직접 내 포크로 찍어서 먹었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 구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고 대충 씹어서 꿀떡 삼켰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네" 한마디 내뱉고 그날 내내 울적하다가 결국 집에 들어와서 엉엉 울었다. 굴욕감 내지는 모멸감 비슷한 감정이었는데, 아직도 나는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마음이 들어서 그 감정을 정의하지 못했다. 분명한 사실은 피클을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다는 것이다.


 대학생 때 기숙사 룸메이트가 김장김치를 가져왔다. 그 친구의 집에서 담근 김치를 다른 친구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어머니가 큰 김치통에 여러 포기를 담아 친구의 손에 들려 보낸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방으로 들어가려고 신발을 벗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소름 돋는 젓갈 냄새가 났으므로, 김치가 이 근방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아주 꺼림칙한 예감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방 안에 가득 들어찬 김장김치 냄새가 났다. 정말 지독했다. 김장철이었으니 당연히 이맘때쯤인 한겨울이었고, 방 안은 히터 열로 가득했으므로 그 냄새는 온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김치 냄새는 한마디로 역겨웠다. 도저히 감내할 수 없어서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냉장고에 두면 안 되냐고 물었으나 되려 나를 예민한 사람 보듯 하며 김장김치는 실온에 묵혀야 한다고 했다. 김치를 싫어하는 내가 알 리 없는 공식이었다. 시험기간도 아니었는데 나는 오로지 김치 때문에 독서실에 처박혀있었다. 방에 도무지 들어갈 수 없었고, 김치 냄새가 잔뜩 뱄을 내 이불과 베개를 생각하니 헛구역질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가 무척 답답하지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헛헛함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갉아먹었다. '왜 나는 이토록 예민하지? 어렸을 때부터 김치 먹는 습관을 들여야 했나?' 연거푸 자문하며 나를 구석으로 내몰았다. 내 존재가 싫어서 훌쩍훌쩍 울었다. 오직 김치 때문에 우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더 울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 냄새를 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까운 사람에게 베푸는 배려는 꼭 필요하다는 것, '안'보다는 '못'에 가까운 사람도 실존한다는 것, 무척이나 보편적인 것도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증오할 만큼 괴로운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김치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자란 세대라도, 노랫말 속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에 대한 물음에 즉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평소에 나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보다 그 이론을 전면 부정하는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 이론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아들러에 따르면 나는 '못'먹는 사람이 아니라 '안'먹는 핑계쟁이고 비겁자고 나약한 인간일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을 '못'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발효식품을 먹지 않을 수 있다면 그까짓 트라우마 뒤에 숨는 비겁함쯤이야 짊어지고 살련다. 혹 누군가가 왜 발효식품을 먹지 않냐고 물어보면 상냥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안 먹어 봤어."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구구절절 비참한 사연을 늘어놓지 않고도, "그냥"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그날까지.



+) 이 글은 다른 음식보다 유독 지독한 한국 사회의 김치 애호에 반(反)해 쓴 글임을, 김치 섭식을 당연시하고 무례하게 강권하는 사람들에 대항해 쓴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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