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윰 Jan 21. 2024

전지적 통행자 시점


매봉 터널 사거리에 자리한 주거와 오피스가 섞여 있는 주상복합 건물, 그곳에 나의 일터가 있다. 건물 뒤쪽,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편으로 나무들이 훤칠한 다리를 자랑하며 쭉 늘어서 있다. 여름이면 잎이 창창하게 우거져 가벼운 빗방울쯤은 우산 없이도 피할 수 있다. 나무 주위로 60~70cm 높이의 경계석을 만들어 놓아서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어느 순간 그곳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찼다. 혼자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 둘 셋 모여 수다 떠는 이들, 통화를 하는 여자, 멍하니 생각에 잠긴 남자. 그들은 모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얇고 기다란 흰 무엇. 때론 흰 무엇이 그것보다 조금 큰 플라스틱 안에 감싸여 있기도 하다. 그들 사이로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출퇴근하면서 그곳을 지나칠 때면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곤 한다.   

   

그들이 있다가 사라진 공간. 앉는 곳과 바닥 여기저기에 종이 팩, 커피 캔, 일회용 컵, 담배꽁초, 빈 담뱃갑 등이 오도카니 놓여 있다. 심지어 샌드위치가 담겼던 플라스틱 용기도 당당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이곳은 금연 구역이라는 표시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흡연율 감소와 건강한 사회 환경 조성을 목표로 각 시, 도, 구에서는 강력한 금연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에 따라 공공장소 및 일부 사설 공간에는 금연 구역이 설정되어 있다. 별도로 흡연 공간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지만, 내가 있는 사무실 주변은 금연 구역 표시만 가득하다. 실정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나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주민들의 민원이 계속되니 어느 날 ‘이곳은 금연 구역입니다.’라는 현수막이 크게 걸렸다. 또 어느 날은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스피커에서는 금연 구역이니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흡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쓰레기를 버린다. 글씨와 소리는 그들에게 가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달아난다.

     

음악 교사는 말한다. 노래를 잘 부르려면 반주하는 악기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스피치 강사나 작가는 말한다. 말을 잘하려면, 글을 잘 쓰려면 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비단, 노래, 스피치, 글 쓰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일에는 잘 듣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무실 뒤 흡연자나 흡연을 금지하는 자들은 서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눈 온 다음 날 출근길, 담배를 피우는 사람 옆에서 눈 속에 박힌 담배꽁초를 집게로 하나하나 집어 올리는 환경미화원이 보인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경계석 위에 제멋대로 놓여 있다. 금연 안내방송은 계속 흘러나오고 금연 현수막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바로 앞에까지 진출해 그들을 압박하듯 걸려있다.




#말하는자 #듣지않는자 #해결책은 #라라크루

작가의 이전글 울음이 모여드는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