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거실이 소란스럽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딸이 치마를 다려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의 주요 다림질 거리는 와이셔츠인데 남편이 다림질을 나보다 잘한다. 소싯적 군복 다리던 실력이 녹슬지 않은 덕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 다림질은 대부분 남편 몫이다.
딸이 다음 주에 3박 4일로 일본 오사카 여행을 간다. 중학교 친구 세 명과 함께. 그날그날 입을 옷의 컨셉이나 색을 맞췄다고 한다. 다려달라는 치마는 베이지나 연갈색 톤으로 맞추기로 한 셋째 날 의상이다. 며칠 전 딸이 그 치마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너무 짧다고 내가 한소리 했었다. 아이는 치마가 구겨져서 그렇다며 다리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다린다고 미니스커트가 롱이 되니? 길이도 짧은데 하필이면 주름치마라니.’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오늘 그 짧은 치마를 남편에게 다려달라고 한 거다. 여행 이틀을 앞둔 일요일 저녁의 일이다. 남편이 치마를 보더니, 언성을 높인다.
“일본 가면 지하철 타느라 계단을 계속 오르락내리락할 텐데, 이 짧은 걸 입겠다고?”
“이거 짧은 거 아냐.”
“안 짧긴 뭐가 안 짧아. 속이 다 보이겠구먼.”
“애들 다 이렇게 입어. 안에 속바지도 붙어 있고.”
딸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남편인데 짧은 치마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등학교 때도 수선한 교복 치마가 짧다며 내려 입으라고 매번 잔소리했던 남편이다. 그 정도는 짧은 것도 아니라며 나는 중재하기 바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짧다 싶어 한마디 거들었으나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편이 못 다려주겠다고 했더니 딸이 직접 스팀다리미를 가져와서 다린다. 입지 말라고 말해도 듣지 않는 딸을 보더니, 남편은 스팀다리미처럼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아이는 그런 아빠를 신경 쓰지 않고 다림질을 끝내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정작 부모 앞에서는 입지 않겠다고 해놓고 몰래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워낙 흉악한 사건 사고가 많은 세상, 딸 가진 부모로서 당연히 걱정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걱정에서 나오는 말을 아이들은 곧잘 꼰대의 잔소리 정도로 취급해버린다. 제대로 번역되어 다가가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말에 부모들은 가끔 이런 말로 답답한 심정을 담아낸다. 너도 나중에 딱 너 같은 딸 낳아봐라, 라고. 예전엔 이 말을 흘려들었는데 내가 그 상황이 되고 보니 그 심정 만분 알겠다.
남편 맘이 내 맘이기에 딸을 설득해보려 방문을 두드렸다. 내일 다른 치마를 사주겠다고 하니 사러 갈 시간이 없다며 딱 잘라 거절한다. 여행지 날씨가 추운데 괜찮겠냐고 하니 레그워머를 할 거니 걱정하지 말란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냉전의 밤이 흘렀다. 헤어진 애인에게 한 번만 만나달라고 질척대는 사람처럼 다음 날 퇴근길에 한 번 더 쇼핑하러 나오지 않겠냐고 딸에게 톡을 보냈다가 대차게 차였다.
퇴근한 남편은 짐 싸는 딸을 보고는 내일 몇 시 비행기냐며 은근슬쩍 말을 건다. 그러더니 그래, 이때 아니면 또 언제 짧은 치마를 입겠냐며 어제보다 한풀 꺾인 톤으로 말을 건넨다. 남편은 화를 잘 내지도 않지만, 냈다가도 먼저 푸는 성격이다. 딸의 여행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이 정도로 말했으니 딸도 조심할 거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으리라. 그래, 이것도 한때다. 뭘 입어도 예쁠 나이지만, 마음껏 꾸미고 싶고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심이야 말해 뭐할까. 예쁨의 기준이 부모와 달라서 문제지.
딸이 여행 간 지 삼 일째다. 오늘 문제의 그 의상을 입고 교토를 휘젓고 왔으리라. 늦은 밤, 딸이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짐이 너무 많은데 내일 공항에 데리러 올 수 있냐고. 딸바보 아빠는 냉큼 간다고 답장을 보낸다. 그러면서 딸에게 하는 말.
- 데리러 가는 대신 차비 내
- ㅋㅋ 과자
- 뽀뽀나 5만 원
- 볼 뽀뽀
컸다고 뽀뽀는 절대 사절하는 딸인데, 5만 원 내기는 더 싫은가 보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아빠와 깍쟁이 딸, 둘 다 막상막하다. 말은 이렇게 해도 요리조리 뽀뽀를 피해 갈 딸인데, 알면서도 속아주는 남편. 뭘 해도 딸이 예쁘다는데 누가 말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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