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고 더뎌 영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홀연히 왔듯이 우리 집에도 더뎠지만,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추석 연휴 풍경이 달라진 것이다. 평소였다면 장 볼 리스트를 정리하고 온라인으로 재료를 주문하고 부족한 것을 사기 위해 마트로 달려가고 음식을 만들고 차례를 지내고 할 시간에 난 밖으로 나갔다. 부부 동반 모임에 참석하고 친구와 익선동 구석구석을 훑고 맛보고 남편과 영화관 데이트를 즐기고 가족들과 외식하고 명동 거리를 거닐었다. 변화는 자연스레 찾아오기도 하지만 스스로 바꾸려 노력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선산이 포항에 있다. 거리가 멀다 보니 가족이 다 함께 조상묘와 어머님, 아버님 산소를 찾는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보통 벌초 겸 성묘는 남편 혼자 다녀왔다. 추석에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는 대신 다 함께 성묘를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다. 둘째 형님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셋째 형님의 강력한 동의로 올 추석부터 실행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추석 전주에 1박 2일로 성묘를 다녀오며 순조로운 변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두 번째 변화는 삼대까지 지내고 있는 제사를 이대까지로 줄이기로 한 일이다. 올봄 증조부 기제사를 지내며 마지막을 고했다. 추석에 성묘하러 가서 친가 어른들께 최종적으로 의향을 전했다. 나이대에 따라 반응이 달랐다. 늦둥이라 남편과 나이 차가 많지 않은 막내 삼촌은 아직도 증조부 제사를 지냈냐며 그만 지내도 된다고 흔쾌히 동의했다. 반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는 나 때는 삼대까지는 지냈는데 라며 말을 아꼈지만 결국은 제사를 지내고 있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세 번째는 제사 지내는 시간을 당기기로 한 것이다. 몇 년 전에 의견을 냈다가 시누이들 반대에 부딪혔었다. 체념하고 있었는데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어머님 기일 다음 날로 시누이들이 1박 2일 여름휴가 일정을 잡은 것이다. 사전에 상의한 일정이 아니어서 일정 통보가 온 다음에야 여행 전날이 어머님 기제사라는 사실을 전할 수 있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깜빡한 거다. 여행 일정을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서로 날짜 맞추기가 쉽지 않아 대신 제사 지내는 시간을 저녁 여덟 시로 당기기로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여덟 시에 기제사를 올리고 저녁을 먹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기일 저녁 여덟 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 엄마가 젊었던 시절 이 섬을 걸었으니까, 우리도 걸어 다니면서 엄마 생각을 합시다. 엄마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기억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 박수를 쳐줄 거야.” (83~84쪽)
정세랑 작가가 쓴 소설 <시선으로부터,> 의 일부분이다.
유교에 입각한 제사 문화는 형식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시대가 바뀌면 문화도 바뀌게 마련인데 여전히 형식에 매여 있다. 형식보다는 마음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왔을 때 행위는 진정한 의미를 가질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추모 방식에 깊이 공감한다.
내년 추석에는 집이 아닌 어딘가에서 어머님, 아버님이 좋아하셨을 것 같은 멋진 기억을 채집해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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