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히만 쇼>를 보고
영화 <아이히만 쇼>와 <책도둑>을 본 후 둘 중 하나를 골라 감상문을 써 보라는 글쓰기 과제가 주어졌다. TV 영화 리스트에는 <아이히만 쇼>만 있었다. 먼저 시청했다. 유대인의 추방과 학살을 주도한 나치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다룬 영화였다. 감상문을 쓰기 위해 어느 때보다 몰입해서 봤다. <책도둑>은 노트북으로 시청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입양된 한 소녀가 어쩌다 책도둑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잔잔한 울림이 있는 영화였다. 둘 중 어느 영화를 선택할지 고민에 빠졌다. 결단은 의외로 빨랐다. <아이히만 쇼>를 선택했다. 역사를 잘 모르는 내가 그것도 납득 불가능한 한 인간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써 내려갈지 나조차 궁금했다. 도전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이 하는 대화 중 하나는 “어느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어?” 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장면도 장면이지만, 유독 나를 끌어당기는 단어가 있었다. 아이히만 재판의 TV 생중계를 맡은 팀이 그들의 성공적인 첫 방송을 축하하던 날 밤이다. 팀의 담당 변호인이 밖에 나와 있는 감독 허위츠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한다. “작업하지 않을 때는 늘 주변을 둘러보더군요.” 허위츠는 답한다. “이곳을 이해하려고요.” 나는 <아이히만 쇼>를 관통하는 단어가 ‘이해하다’라고 생각한다. 허위츠는 영화 속에서 자주 질문하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아이히만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왜’라는 단어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던지는 물음이다. 이해할 의도가 없다면 왜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비난하고 욕하는 데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래서 허위츠는 재판을 지켜본 전 세계 사람들이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범했던 아이히만은 왜 6백만 명의 유대인 추방과 학살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까?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서《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히만은 잔혹한 비도덕적인 일을 행하기 위해 스스로 이유를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늘 자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어 하니까. 히틀러에 대한 충성 맹세를 배신하는 일이야말로 최악의 범죄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로 말이다. 피해자인 프랭클조차도 처음엔 고개를 돌렸던 수용소의 참담한 광경이 시간이 지날수록 무감각해졌다고 말한다. 아이히만이 유대인들의 증언과 잔혹한 영상을 보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건 이런 익숙함에 더해 스스로 인간성을 죽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선택. 그러다 자신이 세운 명분에 스스로 지배당하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믿음에 잠식당한 게 아닌지. 거짓도 반복하다 보면 진실인 양 믿게 되듯이 스스로 만든 그릇된 인식이 정의라고 믿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를 이해하는 실마리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 아이히만을 이해해야 할까? 감독 허위츠가 법정 안에서 제작자 프루트만과 언쟁을 주고받는 장면이 있다. 허위츠는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앉는 유리 칸막이 안쪽 자리를 응시한다. 그때 유리에 비친 허위츠 자신의 얼굴에 아이히만이 덧입혀지는 장면이 나온다. 허위츠 자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시사한 장면이라 하겠다. 이것이 아이히만을 포함한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나의 경험과 생각, 앎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므로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해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이런 인간 내면의 악을 다스리고 선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치 시대에 일어난 유대인을 향한 범죄 행위를 조명하며 인종, 종교의 다름에 대한 수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다름도 사람 자체에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부터다.
당신이라면 <아이히만 쇼>와 <책도둑> 중 어느 영화를 선택하겠는가? 당신의 선택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