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찾고 싶었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자신이 되기로 결정하자마자 미국에 가기로 결정했고, 너를 여기로 데려왔다.” (은유,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p202)
나도 나 자신이 되기로 결정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속 새벽의 엄마처럼 미국으로 떠난 건 아니다. 군대 간 아들의 방을 점령하고 아들의 노트북을 접수했다. 2년 전, 둘째가 고3 때의 일이다. 코로나로 바깥 활동이 제약받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알 수 없는 마음의 허기가 찾아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육아와 가사, 직장 일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버거웠다. 아이들이 크고 나서는 관성에 젖어, 내가 무엇을 놓치고 사는지도 모른 채 습관처럼 일상을 소비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내 미래에 관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마침내 2년 전 9월, 둘째의 대입 수시 원서 접수가 끝나고 나도 내 삶을 찾기로 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 ‘나’로 당당히 서고 싶었다. 그동안 고민의 시간을 거치며 내 안의 작은 열망을 발견한다. 차마 꺼내지 못해 외면하고 있었던 꿈. 글을 쓰고 싶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친구의 응원과 조언에 힘입어 블로그를 개설하고 글을 올리기 시작한다. 보고, 듣고,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관해.
아는 게 없어서 용감했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글이지만, 뭔가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나를 생기 있게 만들었다. 내일은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며 잠드는 밤이 설렜다. 한 편의 글을 올리기 위해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를 보내다시피 했지만, 힘들지 않았다. 그 시간을 즐겼다. 기꺼이 시간을 쪼개어 글을 썼고 진심을 담은 날들이 쌓여갔다. 용기 내서 글쓰기 수업도 기웃거렸다.
정여울 작가는 말한다. “설렘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진짜 늙어가기 시작한다. 진정한 노화는 주름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권태로움에서 시작된다.”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허기를 채워줄 그 무언가가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면서 설레는 나를 믿기로 했다. 남은 인생,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채워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움텄다.
마음은 오락가락한다. 뭣 모를 때는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글쓰기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아갈수록 고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배운 대로 글이 나와주지 않았다. ‘아, 이게 나의 길이 맞는 걸까. 난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수시로 마음을 어지럽혔다. 재능은 교감하는 능력이고 끊임없이 훈련되는 것이라고 어느 작가는 말한다. 그 말을 붙잡고 지금까지 왔는데, 마지막 남은 용기 한 잎이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매일 쓰는 사람이 작가라고 말한다. 언제부턴가 뭔가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것도 잘 써야 한다는.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몇 번의 퇴고를 거쳐야만 조금은 봐줄 만한 글이 나온다는 걸 알아버렸다. 날 것 그대로의 글을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게 되었다. 점점 쓰는 일이 힘들어졌다. 자신감도 떨어졌다. 어느덧 글쓰기의 즐거움은 KTX처럼 사라졌고 고통만이 주인인 양 눌러앉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매일 써야 해? 작가가 되어야 해?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나 스스로를 옭아매는 중압감부터 내려놓기로 한다. 글쓰기를 즐기던 처음 마음을 떠올려 본다. 꼭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작가로 살지 않더라도 나의 생을 의미 있게 하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흔히 글쓰기와 책 읽기는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읽어야 한다고. 여러 책을 읽고 경험과 지식을 넓히고 문장 서랍을 채우려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읽고 서로의 느낌을 나누는 모임에 참여했다. 그림책 모임을 통해 그림책의 묘미도 알아가는 중이다. 그 외에도 관심 가는 책들을 틈틈이 훑고 핥고 있다.
감수성을 열어놓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두루 접하며 그중 얼마라도 내 것으로 흡수할 수 있다면,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며 즐기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 들어온 여러 존재가 나에게 말을 걸고 그 말을 꺼내고 싶어질 때가 오지 않을까.
“작가로 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읽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감수성을 유지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고,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은유,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