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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05. 2023

지리할 새가 없는 구례와의 데이트


부산 여행을 가려던 나를 구례로 이끈 건 우연한 계기였다. 출근길, 지하철 안을 도배한 구례 홍보 사진들. 구례 볼거리 안내도 관심이 갔지만, 먹음직스러운 한정식 사진에 더 구미가 당겼다. 구례하면 지리산. 다리가 후들거리기 전에 지리산을 꼭 올라가 보고 싶었다. 마침 단풍 구경에 딱인 계절이라 더없이 좋은 선택이 되리라.





여행 첫날, 햇볕에 타들어가는 줄 알았다. 여름이 다시 왔나 싶게끔 쨍쨍하다. 가을 갬성 자극하는 노래를 들으며 파란 하늘과 뜨거운 햇볕을 몰고 구례로 달려갔다. 첫 코스는 최첨판댁. 동행자가 토지를 읽고 있는 나를 위해 여정 일 순위로 잡아줬다.


최첨판댁을 들어가기 전, 집 앞 넓은 평지에는 커다란 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서면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안채, 행랑채, 별채 등 집 이곳저곳에서 토지 인물들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 안채 마당에 올라 아씨처럼 기둥 잡고 포즈를 취한다. 한복만 있었으면 제대로 아씨 돼 보는 건데 아쉽다. 대신 토지 8권을 들고 찰칵.


최첨판댁 근처에 토지 드라마 세트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용이네, 야무네, 칠성이네, 한조네 같은 토지 속 등장인물들의 집을 둘러본다. 책으로 읽었던 장면들이 눈앞에서 분주하게 살아난다. 드라마 촬영 사진을 구경하며 배역을 맡았던 그리운 배우들의  모습도 눈에 담는다.


박경리 문학관 앞마당에서 박경리 조각상과 반갑게 인사 나누고. 토지 책들과 손수 쓴 원고들, 토지가 연재됐던 잡지들에게 다소곳이 인사 건네고. 생전 모습과 육성으로 만들어진 영상에 뜨겁게 눈 맞추고. 내 인생이 문학이고, 문학이 내 인생이라는 작가의 글에 작가의 일생을 한 줄로 마음에 담는다.


"왜 쓰는가, 하는 물음은 왜 사는가, 하는 물음과 통합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물음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그 물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합니다." (박경리, 작가는 왜 쓰는가)

왜 쓰는가라는 박경리 작가의 물음을 나 자신에게도 던져본다. 아마도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답을 찾고자 애쓰겠지.



 






여행 둘째 날, 지루하다'의 방언인 '지리하다'가 어원인 산, 지리산에 올랐다. 구례에서 올라가는 코스는 노고단. 노고단 정상 높이가 1507m다. 요즘엔 길이 잘 닦여서 성삼재 주차장(높이 1102m)에 차를 세우고 노고단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 정도쯤이야!


편한 차림에 운동화 신고 내려오는 젊은이들을 보고 얕잡아 봤다가 큰 코 다칠 뻔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오르막길과 돌계단길에 심장은 분주하다. 중간중간 시선을 사로잡는 구름과 햇빛에 얼룩진 산들의 장관에 마음이 댄다. 드디어 오른 정상.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수려한 산세와 절경. 카메라에 담아내느라 눈과 손이 허둥지둥한다.


성삼재 휴게소에서 노고단 정상까지 왕복 9.4킬로 남짓. 3시간 좀 넘게 걸린 시간. 인생에 손꼽을 만한 장소로 마음에 저장한다.


다음 발걸음이 향한 곳은 화엄사. 544년에 지어져 1500년 가까운 시간의 향취가 묻어나는 곳. 절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모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모과나무와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빨간 담쟁이가 경건한 절에 인간적인 다정함을 불어넣는다. 요요한 단풍 옷을 입은 지리산의 엄마품에 안겨서 화엄사가 고아하게 미소 짓고 있다.  







지리할 새가 없었던 구례와의 데이트, 언젠가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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