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cf 카피를 아는가?
많은 엄마들은 언젠가 TV에 나왔을 법한 '아이는 엄마 하기 나름이에요.'에 짓눌리곤 한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코로나가 우리 삶 속에 익숙해지면서 마스크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조금씩 일상을 회복할 때였다.
유명하다는 브런치 식당을 찾았을 때 지인 가족 보다 먼저 도착한 우리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옆 테이블을 보니 우리 딸보다 약간 커 보이는 아이와 함께 식사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가족의 아빠가 가방에서 '사과가 쿵' 보드북을 꺼내드는 것이 아닌가.
보통 휴대폰이나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여주는 부모들을 식당에서 목격하곤 했는데 신선한 충격인 동시에 나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잠시 뒤 일행이 도착했고 그 옆 테이블 부모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됐다.
엄마가 초등학교 교사랬다.
'아, 교육자 집안은 다르구나.'
일터에서 10년 가까이 아동청소년심리정서지원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부모가 아이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좋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일들이 아이에게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나였다.
누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가.
나는 오히려 아는 것이 있어 양육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검열에 시달렸다.
육아휴직 중 가장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는 내가, 행여나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악영향을 주고 있진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가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듯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자녀에게 영상을 보여주는 것은 몹시 보편적인 일인 시대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외로움을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다.
코로나19 시기에 출산을 하고, 육아휴직 기간 동안 오로지 아이를 위해 시간을 쏟았던 시기를 보낸 사실보다 어쩌면 남들과 조금 다르게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느끼는 부분들을 인식하게 될 때 그랬던 것 같다.
난 40개월까지 영상을 자녀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어린이집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
40개월이 지나고부터는 정해진 시간만큼만 영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스스로 태블릿이나 TV를 조작하게 두지 않고 있다.
아이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부모를 모델링하기 때문에 조작하는 방법조차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도중에 언제 영상을 끌지 미리 알리고, 더 보고 싶다고 떼를 써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 후에도 계속 보겠다고 징징거리거나 우겨댈 때, 단호하게 거절하고 다음 기회가 없을 거라 으름장을 놓았다.
특히 식사 중 영상을 보여주는 부모가 많은 편인데 내 사전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단지 아이에게 식사하는 시간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정말 어릴 때에는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에 보드북을 보여주었다.(앞선 가족에게 배운 대로)
스스로 식사를 할 수 없는 연령에는 아이의 식사를 도와야 했기에 아이 식사를 도울 동안 남편이 그 사이 식사를 하고, 그 후 남편이 식사를 마친 아이를 데리고 나가 식당 주변을 산책할 동안 나는 혼자 식당에서 식사를 마저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식당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우선 아이를 들쳐 안고 식당 밖에 나가 아이를 진정시킨 후 다시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더라도 다행히 금방 진정하고 말귀를 알아들어주어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식사를 멈추고 귀가를 했었을 것이다.
아이가 말을 하게 된 후로는 음식이 나오기 전 함께 대화를 하곤 한다.
아이 스스로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후로는 함께 음식을 즐기고 있다.
어릴 때 식사예절 훈육 덕분인지, 아이 기질 덕분인지 몰라도 큰 어려움 없이 식당에서도 식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온전히 식사에만 집중하지는 못해서 시간이 걸리는 편이긴 하다.
나는 아이가 심심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탐색하는 과정을 거쳐, 하고 싶은 것을 함께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이것저것을 먼저 아이가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양육자의 몫이라 여기고 있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
인내의 시간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과거의 시간이 쉽지는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어쩌면 아이를 키우는 것에 있어서도 어려운 길을 선택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육아 방법에 대해 누군가는 유난스럽다고 할 수도 있고 그래봤자 아이들 크는 거 거기서 거기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저항이 있더라도 이겨내고 반복하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나에게는 육아도 마찬가지였다.
천재나 영재로 키우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최소한 마음이 아픈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내 마음이 아파오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