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이 잠자리까지 따라왔다

시작점에서

by 김창훈

사람들은 바리 항구에서 택시나 버스를 타고 삼삼오오 사라졌다.

두브로브니크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어디로 가는지 묻자 ‘나는 거리가 예뻐서 걸으려 해’라고 했다.

그의 여행을 응원하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배낭을 들쳐 메고서 도심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리가 예뻐서 걸으려 한다는 말이 맴돌았다.


도보 여행을 결심했을 때 바다 건너 이탈리아가 보였다.

이탈리아 서북쪽,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훌륭한 도보 여행 장소가 있었지만 고민 끝에 대상에서 제외했다.

오늘날 여전히 도전하는 이들이 선호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당시에도 영화와 책, 예능 프로그램 등으로 홍보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었다.

역설적이게도 도보여행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기에 제외했다.

때론 스스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나 인기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여행을 이어가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던 것 같다.

결심하고 난 후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이탈리아에도 순례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아 프렌치제나(Via Francigena). 영국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영국까지 걷진 않겠지만 순례길이 있는 만큼 도보 여행을 하기 적합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 남쪽 아말피 해안에서부터 밀라노까지 4개의 구간을 나누어 도보 여행을 계획하고 크로아티아에서 아드라아 해를 건너왔다.


이탈리아 도보 여행의 출발지로 선정한 아말피 해안은 포지타노에서 시작되고, 포지타노는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에서 발목쯤에 해당한다.

시칠리아와 코센차 같은 곳이 남쪽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지만 첫 도보여행을 앞두고 극심한 남쪽을 시작점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낯선 국가, 낯선 도시를 두발로 여행한다는 것은 미지의 경험에 대한 두려움과 조금의 흥분을 낳았다.

포지타노에서 살레르노까지 42km 아말피 해안선을 따라 첫 도보 여행을 하며 하며 체력과 여행 방법을 시험한다.


도보 여행이라는 새로운 여행 방법에 관심이 쏠려있는 탓인지 바리 항구에서 터미널까지 걸어가는 길도 도보 여행의 일부로 느껴져 마음이 즐거웠다.

처음 발견한 이탈리아 국기에 기뻐하고, 별것 아닌 건물 양식과 지나가는 차, 피어난 꽃 한 송이에서도 이국적인 것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와 관련된 것을 보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이 즐겁다.

서울 명동과 종로는 곳곳이 중국어와 일본어로 물들었고, 이제 서울 사람들은 명동에 가지 않는다.

한국인이 안 가는 곳에 외국인도 가지 않는다.

한때 명동역 6번 출구를 나와 밀리오레 앞으로 가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앞으로 떠밀려 갈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불과 10여 년 전 일이다.

명동뿐만이 아니라 도심의 상인들은 관광객을 잡기 위해 중국어와 일본어를 남발했지만 여행자는 타국에서 이국적인 것을 찾기 마련이다.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금세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말피 해안으로 직행하는 버스가 없어서 나폴리행 티켓을 구매했다.


탑승한 버스 창밖으로 이탈리아 풍경을 보다가 버스에서 제공하는 Wifi를 통해 교통편만을 재확인 한 뒤 곧장 눈을 감았다.

창문으로 비추는 햇살은 따스했고 야간 이동으로 누적된 피로에 온몸이 나른했다.

바리는 크로아티아에 가까운 동쪽 해안(장화 모양의 이탈리아에서 발뒤꿈치 부근)에 있고 나폴리와 아말피 해안은 그 반대쪽에 있다.

버스로 꼬박 세 시간 걸렸다.




나폴리에서 곧장 기차로 갈아타고 소렌토까지 이동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아말피 해안으로 가고 있다.

새로운 지역에 도착할 때마다 탐방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지만 해가 저물기 전 아말피 해안에 도착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다.

굽이굽이 가던 버스가 언덕을 넘는 동안 목적지를 지나치지 않기 위해 지도와 버스 창밖을 연신 번갈아 봤다.

버스가 내리막에 접어들었을 때 비로소 사진으로 본 아말피 해안이 보였다.

뱃일을 하고 돌아오는 이들을 위해 눈에 잘 띄는 단색으로 외벽을 칠한 집들이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늘어서 있고, 색색의 집이 티레니아 해와 새하얀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건물 외벽을 온통 흰색으로 칠한 지중해 푸른 바다의 그리스 산토리니와 달리 이탈리아의 낭만은 알록달록함에 있는 듯했다.

설레는 감정이 단숨에 치달아 마음을 채웠고, 발을 굴러 저 아름다움 속으로 빠지고 싶었다.


숙소를 찾기 위해 포지타노 메인 시가지에서 세정거장 전 언덕 상단에서 내렸다.

앞뒤 19kg의 배낭을 짊어지고 가파른 언덕 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고, 쏠리는 몸을 지탱해야 하는 탓에 실제보다 경사가 더욱 가파르게 느껴졌다.

여차하면 배낭과 함께 넘어질 생각으로 몸을 뒤로 기울였다.

B&B, Hotel과 같은 숙박 간판이 있는 곳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빈방을 문의해보니 역시 숙박 어플에 표시되지 않는 방이 있었다.

세 번째로 방문했던 B&B가 가격과 경치 모두 훌륭했지만 마을을 구경할 겸 메인 시가지까지 내려가며 계속해서 숙박을 탐색했다.

해가 비추는 포지타노는 순백으로 빛나고 있었다.

배낭을 멘 어깨가 아프고 등에 잔뜩 땀이 배어 나왔지만 눈으로 보는 마을 전경이 천사들의 쉼터처럼 아름다워서 마음이 즐겁다.

해변과 인접한 시가지의 숙박 업소는 위치가 좋은 탓에 빈방이 없거나 터무니없이 비쌌다.

결국은 세 번째로 방문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체크인을 하고 가방을 내려놓자 내 몸안에서도 뭔가가 내려진 듯했다.

전날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야간 페리를 타며 시작된 이동이 이제야 끝났다.

창문을 활짝 열고 폐 가득히 숨을 들이 마쉬며 포지타노 풍경을 바라봤다.

봄날 무더웠던 동남아에서 시작한 여행이 어느새 이탈리아에 이르러 또 하루를 감당하고 있는 내가 좋다.

세계여행은 여행이 연속되고 이 여행의 종점과 시간을 정해두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시간의 유한함을 매우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여행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더욱 그러했다.

여행의 유한함을 느낄 때면 내 삶 또한 유한하다는 것을 떠올렸고 결국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뿐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새로운 도시 새로운 나라의 정보를 탐색하며 어떤 하루를 보낼 것인지 결정하고 움직이는 동안 시간의 흐름은 선명하고 하루하루가 온전히 나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무로 된 숙소 창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고 창가에 앉아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석양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포지타노를 바라봤다.


잊고 있던 허기짐이 몰려왔을 땐 숙소 근처의 둔 파스타 가게에서 해산물 토마토 파스타와 글라스 와인을 한잔 주문했다.

신선한 토마토와 상급의 올리브 오일, 바질 향이 입안에서 조화로웠다.

식사를 마친 뒤에 한잔의 와인에도 불콰해진 얼굴로 마트에 가서 도보 여행을 위한 생수 한 병과 수분이 가득한 복숭아와 자두를 샀다.

숙소로 돌아가는 언덕길에 참지 못하고 복숭아 하나를 베어 물었다.

달콤함에 웃음이 나왔다.


지도상으로 포지타노에서 19km 지점에 마을이 있다.

19km를 걸을 수 있다면 그 정도 간격으로 마을을 경유하며 살레르노까지 갈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모든 짐을 가방에서 뺐다.

등에 큰 여행용 배낭 15kg을 업고, 앞으로 보조 가방 4kg을 멘다.

여행용 배낭은 용량의 마법과 같아서 압축돼있던 짐이 끝없이 나왔다.

병에 든 화장품을 플라스틱 용기에 옮겨 담고, 그동안 잘 입지 않은 옷, 언젠가 입으려고 둔 옷, 없어도 되는 것을 선별했다.

기약 없이 나온 여행길에 나름 최선을 다해 챙긴 것이니 무엇하나 아깝지 않은 것은 없지만 그때의 최선이 지금은 욕심이다.

세계여행 중 이번이 세 번째 짐 정리다.

앞서 두 번을 덜어내고도 문제없이 여행하고 있고, 또 덜어낼 것이 있으니 얼마나 많은 욕심을 짊어지고 왔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깨끗한 바지와 반팔,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가지런히 책상 옆에 뒀다.

핸드폰과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까지 마치니 그제야 준비를 다 한듯해서 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누웠지만 노트북을 펼친 채로 그대로 잠들었다.
일기를 적으려던 욕심이 잠자리까지 따라왔다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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