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것도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도보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일찍 일어나지 않았다.
이 여행은 시간보다 체력과 의지의 싸움이다.
활짝 연 창문 밖으로 여전히 아름다운 포지타노 전경이 보인다.
매일 새로운 장소에서 눈을 뜨는 여행자의 특권을 누리며 창틀에 앉아있다가 밖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커피 냄새를 참을 수 없어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때마침 앞치마를 두른 이가 다가와 조식을 먹으라며 말을 건넸다.
이탈리아 커피는 양이 적고 진하다.
끝 맛에 묘한 달콤함이 맴돌아 마치 초콜릿 같았다.
지난밤 널어둔 빨래는 대부분 말랐다.
양말에 남은 물기는 헤어드라이기로 말리고, 조금 습한 반팔과 반바지는 입었다.
더 지체하지 않고 배낭을 둘러메고 일어섰다.
배낭은 전날 덜어낸 만큼 가벼웠다.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허리끈과 가슴 끈을 당겨 배낭을 몸에 밀착시켰다.
어깨끈까지 모든 끈을 조정하고 나니 무게가 분산되고 안정적이어서 이제야 끈의 존재 이유를 안다.
그동안 걸음은 도착한 곳에 짐을 두고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걸음이었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음이었다.
이번 걸음은 오늘의 집을 떠나 다음의 집으로 가는 걸음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포지타노 숙소에서 아트라니 숙소까지 19Km를 간다.
B&B를 나와서 5분이 채 되지 않아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배낭의 무게는 매섭게 어깨를 짓눌렀다.
덜어낸 만큼 가벼웠던 느낌은 아주 잠시 뿐이었다.
언덕길을 내려와 포지타노 시가지에 도착했을 땐 많은 휴양객들이 상점을 구경하고 해변을 오갔다.
그들 사이를 통과해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벌써 멈춰 서면 19km 앞으로 전진할 수 없을 듯했다.
시가지 끝자락에서 응원하듯 나에게 내밀어진 레몬 첼로를 한잔 받아 마시고 그대로 포지타노를 벗어났다.
“그라시아스!”
레몬의 싱그러운 달콤함 속에 높은 도수가 유쾌하다.
시가지를 감싼 곡선의 도로를 지나자 한순간에 혼자가 됐다.
왈칵 눈물이 났다.
나만 있는 도로를 걸으며 이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게 좋아서 인지 세상에 혼자 나왔다는 자각 때문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홀가분함도 있었다.
북받친 가슴으로부터 차오른 눈물은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푸른 바다 위에 흰색의 배들이 점처럼 떠서 평화로웠다.
마음도 차츰 진정되며 풍경을 따라 평화로워졌다.
배낭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괴롭진 않았고, 시작하면서 흘려낸 땀은 몸이 적응하는 과정이었는지 잦아들었다.
이따금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 외에 이 도로를 걸음으로 이겨내 보겠다는 사람은 나뿐이다.
주로 아말피 해안 바다와 길가에 핀 꽃을 보며 걸었다.
일전에 김훈 선생님의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 자연과 풍경, 움직이는 것과 멈춰있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배웠다.
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인식하지 않으면 보고도 마음에 남지 않고, 인식하고도 보려고 노력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어서 잘 보기 위해서는 차와 같이 빠른 이동보다는 느리게 움직이거나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이동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보다 잘 볼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발은 걷고 눈은 보고 있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좇다 보면 이내 의식이 침잠하며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상태가 됐다.
걷는 동안은 이런 것의 반복이었다.
최초 3km 지점에 앉아서 쉴 때 전날 산 과일을 먹으며 갈증과 허기를 달랬다.
어찌나 달콤하던지 실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행복했다.
고작 3km를 걷고도 베테랑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어 우쭐했다.
짐의 무게가 버겁고 다리마저 무거워질 무렵 만난 마을에서 점심식사를 결심했다.
프라이아노(Praiano) 7.7Km 지점이다.
아주 지치진 않았지만 지나온 길이 고작 7.7km라니 놀랍고 허망했다.
Che Bonta라는 식당 야외석에 앉아 마르게리타 피자 한판을 주문하고, 음료를 되묻는 직원에게 괜찮다고 답했다.
가벼운 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며 애써 콜라가 간절한 속내를 삼켰지만 서글프진 않았다.
이런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더욱 여행자스럽다고 느끼게 했다.
얇은 도우의 피자는 두 입이면 한 조각을 먹을 수 있어서 입안 가득히 욱여넣고 그 맛을 즐겼다.
한국에서 먹던 마르게리타 피자와 구성이 다른 게 없었지만 토마토 베이스의 신선함과 치즈의 풍미가 몹시 좋았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짓눌린 어깨를 펴고 불나던 발바닥도 진정시켰다.
식당을 나서는 길에 아말피 해안을 오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의지가 약해지기 전에 배낭끈을 꽉 잡고 그들 옆을 지나쳤다.
점심시간의 휴식으로 자연스레 솟아나던 웃음과 활력은 얼마 걷지 않아 힘을 내서 웃어야 하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어깨가 뾰족한 돌로 찌르듯 아파서 도대체 가방에 무엇을 담고 다니길래 이렇게 무거운지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온 무게를 지탱하면서 욱신거리는 발바닥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건넸다.
그래도 할만했다.
나는 어느 것도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든 최선을 다할 만한 어떤 것을 찾으면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그것을 찾지 못했다.
그것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여행도 마치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별안간 마음에 뜨거운 오기가 솟구쳤다.
여행을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고난을 자청해서라도 온 힘을 다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걷는 것으로 내 여행의 최선을 다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고,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싶고, 무섭고, 울음이 나올지라도 내가 이 다리로 최선을 다해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나에게 말하고 싶다.
도보여행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였다.
걷는 중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찾아왔다.
내 어린 날의 편린들이 다시 잊힐까 두려워 메모장에 적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적었다.
붙잡지 않은 상념은 이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여행 중 배웠다.
걷고, 걸으며 생각하는 것의 반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