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

아트라니에서

by 김창훈

아트라니 숙소에 도착해서 벨을 눌렀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도시에서 제공하는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담벼락에 기대어 앉았다.

잠시 후 파란 헤어롤 두 개를 도깨비 뿔처럼 달고서 나타난 할머니께서 크게 반겨주시고 문 열어주셨다.
영어를 못하시는지 이탈리아어와 손짓만으로 숙소의 이것저것을 설명하셨는데 어쩐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어서 연신 알겠다고 답했다.
설명을 마치고도 걱정되셨는지 남편분께 전화하셔서 바꿔주셨는데 할아버지께서도 영어를 못하셔서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본인께서도 뒤늦게 상황을 아셨는지 웃으신다.

연신 웃음이 났다.

부산스러움과 푸근함이 정말 집에 온 것 같았다.
숙소 예약 중 나와 에어비엔비 메시지를 주고받은 건 멀리에 사는 아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잘 정돈된 방이 보였다.

나무 바닥에 흰색 가구로 인테리어 된 방은 몹시 아늑했고, 반쯤 열린 창문에 걸린 커튼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는 모습이 바닷가 마을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닮아 좋았다.

무너지듯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포지타노 숙소를 떠나 목적지 숙소에 가방을 내려두며 드디어 하루의 도보여행이 마무리됐다.

‘해냈구나’ 목적지에 도착한 성취감과 안도감, 하루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왠지 모르게 유쾌해서 웃음이 나왔다.

걷는다는 것은 훌륭한 행위다.

걸어온 모든 길을 스스로 통과했다는 느낌이 여실히 든다.

이것은 이동 속도 때문이 아니다.

오롯이 내 신체와 의지로 성취한 것이다.

도심에 살면서 좁아진 도보 이동 거리가 19km까지 확장됐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망원동에서 강남역까지 16.9km는 걸을 엄두를 내본 적이 없다.

교통수단이 없어도 이 두 발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여과 없이 다가온다.

힘들어서 땅만 보고 걸을 때도 있었고, 기분 처지기 싫어서 억지 미소를 지으며 걸을 때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잘 걸었다.

내 체력과 의지에도 감사하다.


아트라니는 아말피 옆에 위치한 아주 작은 도시다.

해안의 아름다움은 다른 아말피 해안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도시 외관은 조금 다르다.

해변으로 향하는 굴다리가 성문처럼 도시 전면부를 감싸고 있고, 그 안쪽으로 넓은 공터가 있다.

공터를 둘러싸고 도시가 형성되어 마치 요새와 같다.

포지타노에서 살레르노로 차를 타고 지나간다면 아트라니의 진면모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녁을 먹기 위해 털레털레 중심가로 향하는데 행사가 진행되는지 군중들이 모여있었다.

중심을 둘러싼 식당가의 주인들도 모두 행사를 지켜보고 있어서 밥을 먹어야 하는 곤혹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군중 틈에 서서 행사를 지켜봤다.

옛 결혼식을 재현하는 듯했는데 모든 과정이 온전한 축복 속에 있어서 보기 좋았다.

광장을 원형으로 둘러싼 사람들은 계단 위, 기둥 뒤, 지붕 위, 다리 위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이 결혼을 축하했다.

도시의 요새 같은 형태가 소리를 모으니 노래와 진행자 목소리와 군중들의 축하 함성이 도시 안쪽으로 울려 더없이 성스러웠다.

온 도시 사람들의 축제다.

행사가 끝나자 그 자리는 빠르게 식당으로 변했고 그중 한 곳에 앉아서 리소토를 먹었다.

종일 움직이니 대사량은 늘고 적당한 양에 만족해야 하는 가난한 배낭 여행자는 늘 배가 고프다.

밥을 먹는 동안 금세 사방이 어두워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벼락에 앉은 고양이와 눈싸움을 하다가 작은 과일가게에서 수박과 청포도를 샀다.

하루 내 참아온 갈증을 분풀이하듯 과일을 먹고 청포도 중 절반은 다음날 도보 여행 간식으로 남겼다.

여행은 준비의 연속이어서 오늘의 여행이 끝나면 내일의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

옷을 벗어서 손빨래부터 하고 도보 경로와 거리, 숙소를 차례로 확인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6km 더 걸어야 하는데 걷는 것보다 날씨가 더 걱정이다.

새벽부터 비가 온다고 예보됐다.

어쩐지 바람이 불고 달은 구름에 가렸다.

배낭도 걱정이고, 우비가 없어서 우산을 써야 하는 것도 걱정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가 좁아서 간신히 라인에 붙어서 걸어왔는데 우산을 펼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등산과도 같은 대안 경로가 있지만 이 무게를 짊어지고 그 길을 갈 자신은 없다.

해안에 붙어서 가는 것이 가야 할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기도 편하다.

상태가 좋지 않은 핸드폰은 내일 가방에서 꺼내지 않을 생각이다.

아직 작동하는 것이 감사하지만 보조 배터리를 이용하지 않으면 금세 방전되는 탓에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꺼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시계와 나침반 그리고 지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진정한 모험가가 될 수 있을까.


내일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몸이 잠겼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오늘의 여정이 꽤 길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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