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지만 출발해야 한다

다시 제 궤도로 돌아온 느낌

by 김창훈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지만 출발해야 한다.

주황색 방수 커버를 씌운 배낭을 등에 메고 검은색 보조 가방을 앞으로 멨다.
옷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땀이나 비로 젖을 테니 반바지와 티셔츠로 족하다.
신발은 앞코가 볼품없게 들렸다.
여행 중 산 노란색 모자를 머리에 쓰고 거울 앞에 섰다.

날씨 탓인지 경직된 모습이 여행자 같다.


배낭은 벌써 무겁고 어깨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다.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끈을 다시 한번 조정하고 조였다.

오늘의 종착지에 도착하면 배낭에 더 줄일 수 있는 짐이 있는지 다시 살펴야 한다.
노르웨이 여행 중 받은 고추장, 스팸, 깻잎도 오늘부터 하나씩 소비해야 한다.
진작 먹었어야 했지만 계속 갖고 다니게 된다.
이 음식들이 짐 속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면 힘이 나고 든든했다.


아말피 해안에 비 냄새가 가득했다.

전날 피로가 누적되어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땅으로 붙어 가는 몸에 그 냄새가 배는 듯했다.
걷는 동안 들려오는 천둥소리와 산발적인 폭우, 젖어오는 신발의 감촉에 이를 꽉 물었다.

옆을 지나가는 차를 볼 때면 이런 기상 상황에도 걷고 있는 내가 우습고 무모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도보 여행을 시작한 지 겨우 이틀 만에 비가 온다며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걷기 시작했을 때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가야 한다.


첫 번째 작은 마을을 지날 때 어디선가 흘러나온 희미한 음식 냄새에 허기가 몰려왔지만 주머니에 가진 게 3유로뿐이었다.
위급 상황 때 버스 탈것을 생각하면 사실 쓸 수 있는 돈이 없었다.

돈을 인출하거나 카드를 써야 했는데 ATM은 안 보이고 아침에 연 작은 가게들은 카드 사용이 안된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더 힘을 빼기 전에 목적지로 이동을 우선하기로 했다.

포기한 아침은 점심에 더 맛있게 먹으면 된다.

몸이 풀렸는지 다음 그리고 그다음 마을까지 쉼 없이 걸어갔다.

두시쯤, 체타라 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굶주린 배로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마을 안쪽으로 가서 파스타 집에 들어갔다.

몸은 국밥처럼 뜨끈하고 든든한 것을 원하지만 별 수 없었다.

그나마 저렴한 오일 파스타를 주문하고서 어깨와 다리를 푸는 동안 몸은 식어갔고 따뜻한 이불속이 그리웠다.

잠시 후, 난감한 염도의 파스타가 나왔다.

오일 파스타의 좋은 향과 적당한 면 삶기마저 아찔한 염도에 가렸다.

한입을 먹은 뒤 더 먹을 용기가 나지 않자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도 거른 뒤라 남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허기를 채워야 했기에 몇 안 되는 토마토에 의지해 접시를 비웠다.


다시 걷는 동안에도 비가 왔다.

폭우가 쏟아질 땐 비를 피할 곳이 있으면 피하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목적지에 빨리 닿는 것이 몸을 위해 좋다는 생각에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그 때문인지 전날보다 덜 쉬고 걸었고, 마음엔 오기가 차올랐다.

신발은 일찌감치 젖어 질퍽거렸고 몸도 땀이나 흩날린 빗방울로 젓었다.

다행히 걷는 동안엔 춥지 않았고 오히려 더위가 가셔 좋았다.

도로가 물에 잠긴 곳은 과감히 발을 디뎌 통과했고 물이 쉴 틈 없이 흘러 내려오는 비탈길도 거침없이 거슬러 올랐다.

어찌 됐건 앞으로 가야만 끝이 나고 살길이 있었다.

걷다 보면 시선이 앞을 향하다가, 주변을 보다가, 땅을 보다가, 생각에 잠기고, 소설을 쓰게 되고, 아무 생각 없는 상태에 빠지는 탓에 눈에 초점이 있다가 없다가 한다.

이따금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어 마시고,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고, 가방에 걸쳐둔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걷는 여행은 아마 이것의 반복이고 전부 인지도 모르겠다.

이 걷는 여행이 너무나 좋다.

어느새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개었다.

날이 개었을 뿐인데 발이 가볍고, 아름다운 건물과 볼거리가 즐비한 관광지가 아닌 그냥 길을 걸을 뿐인데 좋다.

두 발로 이 모든 것을 새기면서 앞으로 가고 있다.


전날보다 한 시간가량 일찍 출발했지만 오후 다섯 시가 조금 지나서 살레르노 숙소에 도착했다.

늘어난 거리와 날씨를 생각하면 정말 열심히 걸어온 것이다.

아트라니에서는 마을 어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며 그날의 기분을 만끽했는데 이번에는 한올의 힘도 몸에 남지 않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일 때부터 목적지가 보인다며 스스로 환호하고 독려해 왔다.
끌어 모을 수 있는 오기를 모두 합하여 걸어온 것 같다.
걷는 내내 육체의 고됨을 견뎌야 했는데 특히 어깨와 발바닥이 그러했다.
전날은 무게를 견디며 묵묵히 걷기만 하면 됐는데 이번엔 여기저기 통증이 느껴지니까 여러 유혹이 피어난 것이 사실이다.
'이쯤이면 많이 걸었으니까 버스를 타자', '비가 오니까 버스를 타자' 라거나.
'지나가는 차가 멈춰 서서 어디까지 가냐며 태워준다고 하면 의탁하자' 란 생각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유혹이 피어날 때마다 오기도 함께 솟아올랐다.

아트라니 숙소에서 살레르노 숙소까지 25Km. 전날보다 먼 거리를 전날의 피로를 안고 걸어왔다.


이번에도 역시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다.

건물로 올라가자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문 앞에 나와 반겨주었다.
할머니도 손녀도 영어를 모르지만 어쩐지 전날처럼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방에 짐을 내려놓고 샤워를 하고 나오는 동안 조손은 쉴 틈 없이 투닥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마음이 편안했다.
순천에서 외할머니와 사는 동안 나도 저렇게 다투고 장난쳤었다.

쑥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일찍부터 알아서 한번 안아드리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집이 무척 아늑하다.


밖에서 식사를 마친 뒤 집으로 곧장 돌아와 비에 젖은 신발과 옷을 빨래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피로가 너무 심한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가만히 천장을 보고 누워서 걸어온 길을 떠올렸다.

유럽을 통과하는 동안 여행이 관광으로 점철되면서 혼란스러웠는데 다시 제 궤도로 돌아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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