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구간
알람도 없이 느지막이 일어난 아침, 샤워를 하고 난 직후 할머니 손에 이끌려 2층 주방에 앉았다.
“커피?”라고 묻는 할머니께 몹시 반가운 표정으로 좋다고 답했다.
다양한 크기의 모카포트가 줄지어있는 선반에서 작은 것을 골라 물을 담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섯 스푼의 커피를 넣은 뒤 흔들어 틈새를 메우고 잔여분은 손으로 쓸어내 수평을 맞춘다.
그리고 모카포트를 재조립하여 가스레인지 위로 올려 끓인다.
모카포트는 금세 끓어올랐고 고소하고 달큰한 향이 피어났다.
에스프레소 잔에 부어주신 커피는 진하고 달콤하다.
포지타노에 도착한 첫날 B&B에서 마신 커피처럼 초콜릿 향이 감도는데 그보다 더한 농밀함이 이 작은 잔에 가득하다.
좋은 원두가 아닌데도 숙련된 솜씨와 모카포트가 만든 조화다.
잔을 금세 비워버리고 황홀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모카포트에 남은 커피를 잔에 한번 더 부어주시면서 웃으신다.
잠시 후 밑에서 손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자 재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주방을 떠나셨다.
에스프레소 잔으로 두 잔인데도 농밀함 탓인지 머리가 경미하게 어지러웠다.
서둘러 식탁 위의 크루아상과 시리얼을 먹었다.
도보 여행을 위해 이탈리아를 총 4개의 구간으로 나눴다.
남단에서 북단까지 종주를 고려한 적도 있지만 종주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본질이 아니다.
도보로 여행하는 것이다.
44km 아말피 해안 구역 다음은 로마다.
처음엔 로마를 그대로 가로질러서 지나칠 것을 계획했다가 종국엔 로마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다.
숙소를 동서남북으로 이동하면서 4일에 걸쳐서 로마 전역을 도보로 여행할 생각이다.
다시 짐을 짊어져야 할 시간이다.
하루에 25km까지 걸을 수 있었다는 경험적 사실이 자신감을 준다.
살레르노 숙소를 떠나기 전에 배낭에서 옷을 한번 더 덜었다.
그렇게 덜어내고도 또 덜어낼 것이 있다니 놀라웠다.
기차와 비슷한 이동 시간에 절반 가격이고 예약이 쉬운 Flix 버스를 탔다.
로마 정보를 살펴본 뒤 눈을 감았지만 뒤에 앉으신 할머니께서 자세가 불안정 하신지 의자를 자꾸 잡아당기셨고 그때마다 뒤로 당겨지는 의자 탓에 깊은 잠에 들 수 없었다.
뒤척이다가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서 책을 봤다.
한 남자는 버스가 이동하는 세 시간 동안 통화를 했고 커지는 목소리에 주변의 한숨도 늘어갔다.
사람들이 여러 차례 조용히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가 조용할 때는 그때뿐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잠을 포기한 데다가 노래를 듣고 있어서 괜찮았다.
뒤에 앉은 할머니께서 고양이를 데리고 탔는지 그 고양이가 울기 시작했다.
로마에 대한 환상이 있다.
온갖 유적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압도되고 상상의 나래가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다.
그리스 신화가 로마 신화가 됐고 그 신화는 내 어릴 적 상상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로마에 대한 다른 여행자의 정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환상은 깨지지 않았고 이런 환상이 로마를 지나치지 못하게 했다.
살레르노에서 로마까지는 3시간이 소요됐다.
로마 테르미니에 도착하자마자 트레비 분수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숙소까지 이동하는 것을 로마 1일 차 도보 경로로 잡았는데 숙소가 바티칸 시티 좌측에 있다 보니 테르미니에서 시내 중심부를 관통해야 했다.
내리쬐는 햇볕에 덥고 짐은 무거웠지만 로마에 왔다는 고양감과 로마를 둘러보는 즐거움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경찰 제복, 피아트 차, 울퉁불퉁한 도로, 유적으로 보이는 건축물들 모두가 눈에 알알이 박혔다.
로마에 와서도 아말피 해안에서 느끼던 정취의 결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물론 바다와 도시의 환경이 다른 탓에 바닷가의 정취는 없지만 로마에도 눈에 띄는 현대식 건물이 없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준다.
이 도시에 현대식 건물의 차가움이 없었으면 했다.
인터넷과 화장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식사 가격도 저렴한 맥도널드에서 허기를 달랬다.
트레비 분수에 도착해서 수많은 인파에 놀라다가 멀지 않은 곳에 스페인 광장이 있다는 것을 지도에서 확인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스페인 광장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나온 장면의 배경이 되며 유명해진 장소다.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조차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여행의 마법이다.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이 특별하다.
광장의 계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도시의 여행은 이렇게 발 닿는 대로 걸어가서 숙소에 도착하면 마무리될 모양이다.
숙소까지 5km가량 더 가야 하는데 25km를 걸은 경험이 한계치를 높여준 탓인지 아직 체력이 넉넉했다.
다만 왠지 조금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