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중심가를 벗어난 뒤 테베레 강을 건너자 운행을 멈춘 회전목마가 있었다.
그 앞쪽에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 사진과 포스터를 판매하는 노점이 있었고, 조금 더 걸어가니 산탄젤로 성이 보였다.
산탄젤로 성의 먼 뒤편으로 바티칸의 푸른 돔이 있으니 이 무슨 영화 같은 풍경인가 싶어 어지러웠다.
형형색색으로 멋진 옷을 입은 관광객들이 없다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난대 없이 과거로 이동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명소와 낭만이 도시 안에 즐비한 것에 어안이 벙벙해서 사방을 둘러보며 산탄젤로 성 앞에 서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그 선명한 선율에 고개를 두리번거려 보니 산탄젤로 다리 위에 자리 잡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곧이어 반주 음악이 담긴 CD를 준비하고, 목소리를 대신하여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했다.
짐을 바닥에 내려두고 그늘 쪽에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산들한 바람이 불어오고, 다리 밑으로 강이 흐르고, 강 옆으로 늘어선 가로수 나무들은 싱그러웠다.
멀리 보이는 언덕 경사면에는 아말피처럼 알록달록한 집들이 붙어있었고, 서쪽으로 지는 해가 그 언덕 위로 내려앉으며 따스했다.
연주자는 산탄젤로 다리 양쪽으로 늘어선 천사들의 조각상 사이에 서있었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온몸에 행복감이 휘감아 돌아서 이 순간을 잊지 않고 싶었다.
도시에 온 뒤로 좁았던 시야가 그제야 트이고 마음이 편했다.
연주를 마친 청년을 위해 동전을 바이올린 케이스에 넣었는데 음악이 준 행복에 비해 적은 것 같았다.
산탄젤로 다리에서 보이는 바티칸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으로 우회하여 걸었다.
음악이 준 행복은 얼마 못 가 가방 무게에 으스러졌다.
바티칸을 왼쪽으로 지나쳐서 긴 경사 구간을 통과한 뒤에 간신히 숙소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기진맥진했다.
언덕 위에 있을 줄이야. 그날 로마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였는데 이유가 있었다.
가장 가파른 경사를 올라갈 때는 된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숙소는 혼성 도미토리였고 3개의 침대 중 2개는 먼저 온 여행자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사전에 해당 정보가 없었지만 씻고 자는 것만 해결되면 문제없었다.
각기 개인 침대인 데다가 서로 간격도 멀고 내부가 깔끔해서 좋았다.
여행 중 유독 저렴한 곳은 침대 수가 많거나 혼성 도미토리였다.
처음에는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여행자들로 인해 당혹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피할 곳도 없으니 언젠가부터 나도 옷을 갈아입는 것에 태평해졌다.
단기간 여행이거나 소중한 사람과 떠난 여행에서는 안락한 실내, 전망 좋은 숙소 위치, 근사한 조식과 어메니티 등도 고려 대상이겠지만 나와 같은 여행자가 숙소로 가서 하는 일은 자는 것과 씻는 것이 전부여서 그 외에 많은 것이 무용하다.
물론 여행자를 만나고 정보를 교류하는 즐거움도 여행자 숙소의 일부지만 이것은 그날 만나는 여행자에 좌우되는 것이어서 숙소와 무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미국에서 온 여행자는 늦게 들어와서 인사하지 못했고 아르헨티나에서 온 여행자는 성격이 시원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식비 소모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사 온 컵라면 두 개를 꺼내서 그녀가 준비한 조각 피자와 나눠 먹었는데 뱃속에서 더 자극적인 한국 라면과 쌀밥, 김치를 달라고 아우성쳤다.
침대에 누워서 로마에서의 첫걸음을 떠올렸다.
결과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거의 통과만 한셈인데도 이렇게 도시를 돌아다닌 다는 것은 힘들다.
로마 자체에 대한 감상은 좋지만 도보여행을 결심한 취지에 비춰 하루를 돌아보면 만족스럽지 않았다.
왠지 가봐야 할 것 같은 장소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보니 동선이 돌아가게 되고 잦은 머무름이 발생했다.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다.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가야 하는 것도 힘들다.
눈과 머리가 바쁘니 생각하는 것도 줄어들고, 도보여행의 목표나 이유도 잊게 된다.
마음 한편에 로마에서 도보 여행한다는 것이 잘못된 판단은 아닌지 불안감이 생겼다.
아말피 해안을 걷던 것과 같은 만족감이 왜 이곳에 없는지, 어떻게 해야 로마에서도 만족스러운 도보 여행을 할 수 있는지 고민 중이다.
새벽과도 같은 이른 아침, 부산함에 눈을 떠보니 한 명은 판테온으로 간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시내를 돌아본다고 했다.
다른 여행자들도 제각각 로마를 두 발로 걷는다.
나는 오늘 숙소에서 짐을 짊어지고 여행을 시작해서 다음 숙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하루 여행을 마치고 다른 여행자들은 다시 이 숙소로 돌아온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한번 떠진 눈은 쉽사리 감기지 않았고 그대로 일어나서 로마의 아침을 맞이했다.
정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서기 전까지 하루의 경로를 고민했다.
본디 숙소를 로마 동쪽으로 예약하고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을 경유해서 그 숙소에 도착하는 것을 계획했으나 현재 머무는 곳에서 가까운 바티칸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전날 시스티나 성당을 예찬하던 여행자의 말에 팔랑인 귀는 아침에 재차 권유하는 말에 한번 더 흔들렸고 급기야 집을 나선 후에 경로를 꺾어 바티칸 박물관 입장을 위한 줄을 서기에 이르렀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휩쓸려 박물관과 성당을 탐험하다 보니 도보여행보다 더 많은 피로가 다리에 쌓이는 느낌이었다.
바티칸의 모든 것을 볼 생각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독일을 떠나면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이제 안 간다고 다짐했는데도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도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황홀했다.
그 모든 내부 여행을 마치고 대 성당 앞 오벨리스크로 나왔을 땐 기진맥진하고 더위에 어지러웠다.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이 그리워서 가까운 젤라토 가게를 찾았다.
바티칸에 입장하기 전에 줄을 설 때 앞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몸을 돌려서 자리를 맡아줄 수 있냐고 묻길래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꽤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손에 들고 나타나서 고맙다며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챠오” 고맙다고 답하며 웃어 보였다.
고소함과 조금의 버터리함이 섞여 매력적인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먹는 동안에 도보 경로나 일정에 대한 고민을 잊었고 다 먹은 뒤엔 마음이 즐거움과 기대로 가득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마법처럼 전환이 필요한 순간엔 이 아이스크림을 찾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