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에 착각을 했다
계획대로 앞으로 가지 못한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걷는 동안 여행자를 붙잡는 잡상인들은 나에게 오지 않는다.
좀도둑이나 소매치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보기에도 내 행색이 몹시 고단해 보였을 것이다.
앞뒤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것은 의지와 끝없는 싸움이었고 실제로 나는 힘들었다.
거리의 수많은 상인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그런 심경을 담아 전했다.
포로 로마노에 도착했을 때는 꽤 지쳐있었고 그 황량한 폐허에서 지식의 빈곤함과 보는 눈이 없음을 탄식하게 됐다.
그곳에 가면 그 모든 위대함이 스스로 내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캄피돌리오 언덕에 올라서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폐허일 뿐이었다.
여기저기 움직이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분주했지만 세상은 고요했고 느릿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곳을 스쳐 지나갔다.
콜로세움 또한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본 콜로세움과 가까이 다가 간 콜로세움은 서로 다른 바가 없어서 멋과 기술의 대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늘 사진으로 보던 것이 눈앞에 실재하는 것에 대한 감흥 정도가 있었다.
당시 생활환경과 정치, 문화, 기술력 등을 아우르는 역사적 배경 지식이 있는 이에게 보이는 로마와 위대함이 제 발로 다가와 압도되길 바라는 나의 로마는 꽤나 큰 차이가 있었으나 당시에는 그러한 괴리를 알 수 없었다.
로마를 떠나고 한참 뒤에야 조금의 지식을 얻고 다시 그 장소에 가고 싶어졌다.
콜로세움에서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어마어마한 크기의 개선문이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로마 여기저기에 역사의 산물이 서 있다.
왠지 힘이 쑥 빠졌다.
오늘이야 말로 된장찌개 한 그릇 먹고 힘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식당을 찾아갔다.
핀란드를 떠난 후 첫 한식당이었다.
이번 여행의 본질은 ‘도보여행’에 있었으나 관광명소를 거점 삼으면서 본질이 변한 느낌이다.
여지없이 두 공기를 먹고 비싼 소주도 한 병 마셨다.
왠지 속이 탔다.
전날 식비를 줄인다며 컵라면을 사 먹은 것이 결국 이렇게 과소비로 돌아온다.
식당 와이파이를 연결하여 숙소 예약 정보를 확인하니 예약했던 에어비앤비가 취소됐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내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인도 청년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는 이탈리아 남자와 일본 남자, 정체 모를 남자가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 온 이탈리아 남자는 꽤나 수다스러웠으나 태반이 이탈리아어였고, 일본인은 수줍어하며 웃기만 했다.
정체 모를 남자는 과묵하여 별 반응이 없었다.
어쨌거나 모두 영어에 서툰 사람들이어서 더듬더듬 통성명을 하고 반갑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각자의 할 일을 했다.
전날은 판테온을 중심으로 위쪽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오늘은 판테온 아래쪽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렀다.
이틀간 로마를 걸은 결과를 도보 여행이라고 해야 할지 관광명소에 휩쓸린 가난한 여행자의 도보 이동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고 지쳐있기만 한 하다.
아말피 해안을 걷는 것은 오직 내 체력과 의지의 싸움이었고 25km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성취감과 만족감이 있었다.
오늘의 숙소를 떠나 다음 숙소를 향해 걸었고 걸어온 거리와 남은 거리만이 유일한 척도였다.
로마에서는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고 있다.
우선 계획한 대로 로마 남쪽에 있는 카타콤베로 가려한다.
이른 아침 짐을 챙겨서 곧장 숙소를 나섰다.
남쪽으로 가는 길에 관광객은 없었고 로마 사람들의 일상이 있었다.
출근길 위의 차들과 청소부, 학생들의 발걸음을 보며 걷는 길이 반가웠다.
이곳엔 욕심을 부릴 관광명소가 없다.
돈의 흐름을 따라 밀집한 상권에선 복잡함과 활기를 느낄 수 있지만 그곳에서 멀어질수록 주택가의 여유로움과 낯선 도시가 여행자에게 주는 미묘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목적지를 향해 걷는 행위만 남아 평온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지난 이틀간은 내면에 끝없이 솟아나는 욕심과의 싸움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카타콤베에 도착해서 가이드와 함께 투어를 다녀오고, 입구에 마련된 쉼터에 앉았을 때 로마를 벗어나 3차 도보 여행 장소로 이동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로마에 있는 동안은 시내 중심부에 몰려있는 각종 명소의 유혹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오늘 역시 숙소에서 카타콤베까지 7km 정도를 걸었을 뿐이다.
OSTIENSE 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 탓에 인상을 쓰면서도 쉬지 않고 3km를 걸었고 기차역에서 표를 끊고 나니 그제야 배가 고팠다.
샌드위치 두 개와 콜라 하나를 사서 미리 플랫폼으로 갔다.
기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탓에 플랫폼은 텅 비어있었다.
짐을 내려두고 철로를 따라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는 동안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결국 전제가 잘못됐다.
로마처럼 특정 관광 도시는 '내가 생각하는' 도보 여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이런 도시에 진입하는 과정이 도보여행이고 도시에 진입하면 숙소를 잡고 이 도시를 여유 있게 둘러봐야 한다.
이런 깨우침은 다음 여정에 도움이 됐다.
로마에 대한 환상 속에 착각을 했다.
우리가 고대 로마로 알고 있는 곳은 현재 로마의 1/10도 안된다.
깊은 사유를 동반한 연구가 아니라 보는 것에 족하다면 가방을 벗은 채로 하루 혹은 이틀이면 모든 것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앉아서 그간 느낀 것을 정리하며 스스로도 두 번째 도보여행 계획은 실패였음을 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샌드위치를 먹다가 핸드폰을 켜서 도시에서 도보 여행할 생각을 하는 것은 바보라고 영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