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과 구릉을 가로질러 걷는다
그로세토(Grosseto) 기차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부온콘벤토(Buonconvento)에 도착했다.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 양옆에 드넓은 밭이 펼쳐져있었고, 풍경에 마음이 곧장 너그러워졌다.
가방의 무게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숙소까지 간다는 목적이 간결하고 명쾌한 만큼 발걸음도 가벼웠다.
봐야 하는 것보다 가는 길에 보이는 것을 그저 눈에 담기만 하면 됐다.
로마를 서둘러 벗어난 결정이 옳았다.
로마가 안 좋았다기보다 도보여행을 하고자 했던 취지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도보여행을 계획한 것이 처음이고 아직 여행에 대해서도 미숙하다.
부온콘벤토에 도착하기 전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숙박을 알아보며 비싸다는 생각을 했는데 도착하니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이었다.
방 네 개, 화장실 두 개, 그 모든 것 만한 거실과 다양한 조리도구가 구비된 주방 공간이 있었다.
가족 단위의 여행자가 이곳에 왔다면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숙박을 했을 텐데 혼자인 게 아쉬웠다.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활용해야 돈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아서 짐을 풀어 이곳저곳에 펼쳤다.
주방과 조리도구가 있으니 저녁은 파스타를 할 생각이다.
필요한 식재료를 확인하고 마트 위치를 살피던 중 부엌 한편에 작은 메모지를 발견했다.
1km 떨어진 곳에 마트가 있다는 메모를 믿고 길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와 곧장 들판을 가로질렀는데 방향을 잘 못 잡은 탓인지 2km를 걷고서야 작은 마을 초입에 있는 마트를 발견 할 수 있었다.
필요한 식자재를 구입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덕 연기를 뿜는 피자집에서 페퍼로니 한판을 포장했다.
동양인 여행자가 신기했는지 동네 꼬마들이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넨다.
“헬로, 헬로”.
"차오(Ciao)!"
나 역시 그들에게 화답했다.
생각보다 멀리 나온 탓에 집까지 단번에 가지 못하고 해바라기가 서있는 밭에 잠시 앉았다.
해질 무렵의 정취가 좋아서 그 고즈넉한 풍경을 보며 포장한 피자를 먹었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자 넓은 숙소 공간이 음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래를 틀고 모든 방에 불을 켰다.
화재가 발생해도 구해줄 사람이 없을 듯해서 차마 벽난로는 켜지 못했다.
로마에서 못한 빨래를 하고 3차 도보 경로를 살폈다.
부온콘벤토에서 피렌체까지 97km를 간다.
아말피 해안처럼 휴양지가 아니고, 로마처럼 관광객이 많은 곳도 아니기 때문에 왠지 결연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지도를 보며 길 위를 걸어야 한다.
계획과 정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일기를 쓰려할 때 문득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엔 이토록 오랫동안 혼자가 돼본 적이 없다.
여행지의 군중들 틈을 통과하지만 접점이 없는 이들 사이에선 결국 혼자다.
혼자라는 사실과 외로움이 나쁘지 않았다.
모두 내가 자청한 것이다.
넓고 좋은 집이지만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다.
숙소를 떠나기 전에 파스타를 한번 더 만들고 남은 재료는 메모를 붙여 선반 위에 뒀다.
다음 여행자를 위한 마음이다.
나도 이곳에서 요리할 때 이전 사람들이 남겨둔 재료 도움을 받았다.
다리를 건넌 후 오솔길을 통과했고 대부분 들판 위를 걸었다.
짐은 여전히 무겁지만 무게와 고통에 적응한 것인지 감내할만했다.
더 이상 짐을 덜어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차 도보 여행 경로를 걸으면서 이것저것 신경 써서 볼거리가 없으니 자유롭다.
저절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말피 해안을 걷던 때와 같았다.
바로 전날까지 로마를 걸을 때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사진을 찍고, 검색하며 분주했다.
많은 것이 상반됐다.
시야가 트인 들판과 구릉을 가로질러 걷는다.
먼 구릉에 길쭉한 나무가 세 개 네 개씩 줄지어서 있는데 미술관에서 볼 법한 풍경들이다.
유럽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런 그림을 그렸나 보다.
이곳과 피렌체, 시에나, 피사를 포함하여 토스카나주다.
비옥한 토양을 지닌 토스카나주는 농업 용도의 구릉지대가 많다.
무엇이 심어져 있던 밭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수확되고 땅이 뒤엎어져 있는 곳이 많았다.
부온콘벤토에서 시에나(Siena)까지 25Km 가는 것이 오늘의 목표인데 꽤 긴 구간 이런 황량한 들판을 보면서 걸었다.
양옆으로 끝없이 밭이 반복되고 내리쬐는 햇살은 어찌나 뜨거운지 물을 마시고도 땀으로 다 배출됐다.
지도상 북쪽으로 가고 있는데 태양은 계속 뒤에 있었다.
어깨의 고통이 가장 힘들었다.
짐은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었지만 한번 아프기 시작한 어깨의 근육은 쉽게 통증을 느꼈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아무 곳에서나 앉아서 쉬었다.
이전에는 그래도 쉴 만한 곳에서 쉬었는데 언젠가부터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쉬어야 한다고 판단하면 바로 가방을 내리고 앉았다.
점심도 그렇게 아무 곳에나 앉아서 먹었다.
길 위에 발 펴고 앉아서 전날 남겨온 피자를 먹고 있으니 지나가는 차마다 속력을 줄이고 눈길을 던졌다.
참고 참던 화장실을 가기 위해 지나던 동네 큰 마트에 들어갔다.
직원에게 화장실을 써도 되냐고 물어보자 친절하게 이탈리아어로 설명해 줬다.
방향을 설명하는 듯한 말과 표정을 하기에 일단 고맙다고 하고 손짓한 방향으로 가서 문을 열었는데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외부 출입문이었다.
그 문을 다시 닫으면 되는데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 문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아버렸다.
문은 밖에서 다시 열리지 않았다.
계산대를 통과하지 않고 밖으로 나온 셈이어서 물건을 들고 있었다면 꼼짝없이 도둑이다.
스스로 어이없어하며 다시 출입문쪽으로 가니 직원들이 미소 지었다.
민망해서 그냥 가고 싶었지만 화장실이 급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행 중에 화장실이 늘 문제다.
필요할 때 발견하기 힘들거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까워서 참다 보니 없던 방광염이 생길 지경이다.
이번 도보 여행과 대자연을 헤매고 다니던 노르웨이 여행이 특히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