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통스러운 것만 유일했다

시에나

by 김창훈

한참을 걷다가 다섯 번째쯤 쉴 때 가방을 베고 누웠다.

하늘의 구름을 눈으로 좇으며 아말피에서 25Km도 이렇게 멀었었나 생각했다.

내 걸음의 치열함과 육체의 고통과 별개로 세상은 너무나 넓고 평화롭다.

핸드폰에선 저스틴 비버의 곡 ’What do you mean’이 재생되고 있었다.

혼자 자지러지게 웃으며 필리핀을 떠올렸다.

필리핀을 떠나기 2주 전에 칸타, 카쿠라는 일본인 2명과 지냈는데 두 친구는 영어를 거의 못하는 상태에서 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어느 날 방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왓 두유 민 왓 두유 민 하며 둘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웃으면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같은 선생님에게 어학 수업을 받는데 둘에게 매번 화내고 구박한다는 거다.
수업 때 하는 말도 모르겠고, 왜 화내는지도 모르겠어서 언젠가 이 노래를 불러주기 위해 연습 중이라고 했다.

그들은 샤워를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이 노래를 중얼거렸다.

그 기억이 떠올라서 혼자 낄낄댄다.

평화로운 토스카나의 하늘과 필리핀의 하늘은 똑같이 푸르렀다.
사소한 기억에 한참을 웃고 나니 힘든 것을 잠시 잊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거 그건 뭐지,

이 여행 동안 정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난 뭘 하고 싶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 처음에 많은 생각이 떠오르다가 이내 '어떤 것을 보는 것'에 상당수 귀결되는 듯했다.

정말 이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까?

정말 이것을 연속하면서 내가 원하는 세계여행을 꾸려가고 있는 걸까?

여행을 잘하는 건 뭘까, 사람들은 세계여행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세계여행을 떠났지를 계속해서 묻는다.




갈증을 견디기 힘들었고 500ml의 생수병에 크게 두 모금밖에 남지 않은 물을 아주 잘게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더위와 갈증과 육체의 고통스러움을 감내하며 계속 걸었다.

어깨가 아플 땐 짐을 내려 이 아픔이 가시길 바랐고, 발바닥이 아플 땐 앉고 싶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만 유일해서 모든 것을 동시에 괴로워하진 않았다.


오랜 시간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하며 걷는 동안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5km 남겨둔 지점이었다.

토스카나의 낮은 구릉이 만드는 완만한 능선에 초록의 나무와 각종 식물이 우거져 싱그러웠다.

초록의 풍경이 주는 싱그러운 활력이 있어서 그 힘을 업고 계속 걸었다.

마침에 시에나(Siena)에 도착했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거대한 문을 통과해야 했다.

중세시대 성으로 입장한다.

돌멩이를 짜 맞춘 도로의 울퉁불퉁함과 성벽, 중세시대 양식의 건물 사이를 걸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지켜지고 있는 것들이 반갑다.

지도를 보며 들어선 골목길에선 프라하를 회상했다.

역사에서 두 차례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프라하는 다양한 건축 양식이 도시 곳곳에 퍼져있고 전쟁 중에 도 훼손되지 않았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만나는 여러 도시 풍경 속에서 프라하를 떠올리는 날이 많다.

점점 좁아지던 골목 끝에는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 있었다.

캄포 광장이다.

광장은 정면의 궁전 방향으로 경사진 조개 모양을 형성하고 있었고, 궁전의 중앙 탑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높았다.

주변이 중세시대 건물로 둘러싸여 있으나 굉장히 넓어서 트인 느낌이었다.

장소에 압도되어 우두커니 서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연신 감탄하는지도 모른다.

광장에 눕고, 앉은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 광장에 앉았다가 이후에는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웠다.

눈앞에 첨탑은 누워야지만 그 끝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지도상 숙소 위치가 이 광장에서 가깝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여기며 마음 놓고 순간을 즐겼다.

고된 걸음을 모두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광장을 처음 보던 순간과 같은 시야를 사진에 담아보려고 애쓰다가 화각이 좁아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더 쉰 후 발걸음을 숙소로 옮겼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도시 풍경이 경이롭다.

숙소는 계단식 구조로 된 경사면에 있어서 다른 건물에 시야를 방해받지 않고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창문을 열고 하염없이 도시를 바라보는 중에 누군가가 부는 피리소리가 건물이 만든 골짜기를 타고 선명하게 들렸다.

시에나에 대해 검색해 보니 'Letters to Juliet'이라는 영화의 무대라고 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영화가 될법한 도시였다.

피렌체로 향하는 세 번째 도보 여정 중 구간별 거점 정도로 여겼던 시에나는 뜻밖의 선물 같았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명소였으나 도보여행에 초점을 맞추며 가진 바 정보가 빈약한 탓에 더욱 놀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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