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목표가 단일하고 분명하기에 머릿속은 깔끔했다

그 사람이 많이 그리웠다

by 김창훈

다음날 아침, 창밖에서 들리는 새소리에 일찍 눈을 떠서 기지개를 켜고 창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영화 속 말괄량이처럼 상체를 창문 밖으로 빼고 적갈색의 건물들과 성벽으로 오밀조밀한 도시 전경을 봤다.

질림 없이 아름다웠다.

더위가 없는 이른 아침이기에 가볍게 산책을 나서서 작은 반경으로 성당과 도시 골목을 걷고, 캄포 광장 쪽으로 돌아왔다.

시에나의 아름다움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느릿하게 아침을 보내다가 거의 11시가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25Km를 걸어가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늦은 시작이었다.


시에나에서 콜레 디 발 델사(Colle di Val d'Elsa)까지 25Km가 오늘의 목표다.

시에나에서 출발하는 길은 아름답고 친근해서 이곳에 살면 사람이 저절로 온화해질 듯했다.

전날 경로와 달리 황량한 흙밭은 없었다.

걷는 길을 따라 많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양 옆으로 푸르른 밭이 있는데 대부분 포도와 올리브인 듯했다.

이전엔 차도에 많이 의지했는데 이번 경로는 차도를 벗어나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좋았다.

차도는 경로가 분명하고 사람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심적으로 편하고 안정적이지만 걷는 재미는 떨어진다.

이곳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 여럿이 속도를 낮추고서 인사하거나 격려해 줘서 기분이 좋았다.
응원은 차를 타고 가는 분들에게도 받는다.

그들은 클락션을 울리고 창문 밖으로 손짓을 하거나 휘파람을 불어 주곤 한다.
그런 작은 응원과 관심이 발걸음에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른다.

걷기 시작할 때 점심을 먹을 마을을 생각해 두는 편인데 이번에 계획한 곳은 몬테리지오니(Monteriggioni)다.

도착해 보니 작은 도시가 또 하나의 성이다.

중세시대에 남과 북으로 이동하던 상인들은 이렇게 걷고, 성벽으로 둘러싼 마을에 들러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성문 안쪽에 작은 광장을 빙 둘러싼 식당 중 그늘진 테라스가 있는 곳에 앉았다.

치킨 스테이크와 걷는 동안 포도밭을 보면서 계속 생각했던 와인을 주문했다.

아쉽게도 토마토를 제외한 가니쉬가 없었지만 모자란 대로 좋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광장과 성곽을 본다.

'우연히 도보 경로를 잘 선택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쉬고, 풍경에 위로를 받긴 했지만 발바닥과 어깨의 고통은 여전했다.

발바닥의 통증에 점점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걷다가 잠시 쉴 때는 과일을 꺼내어 먹었다.
도보여행을 하면서 매일 밤 과일을 사고 있다.

수분과 당도가 있는 것을 좋아해서 복숭아와 자두를 주로 구입한다.

시에나에서도 자두 2개와 복숭아 2개를 샀고 복숭아는 아침에 먹었다.
아스팔트에 앉아서 복숭아를 먹고, 잔디밭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발바닥을 주무르고, 나무에 기대어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그렇게 목적지로 간신히 가고 있다.


하루의 목표가 단일하고 분명하기에 머릿속은 깔끔했다.

보이는 것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가고 또 흘려보냈다.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었고, 그에게 사과하지 못한 일이 생각났다.

참 좋아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관계의 멀어짐이 안타까웠고, 관계의 회복을 떠나서 사과를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왠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쌓일수록 더 그러했다.

굳이 멀어진 사람에게 연락할 정도로 복잡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지만 내가 가진 인연 중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이지만 공감하는 것이 많아서 여행 중에 생각날 때가 많았다.

그 사람이 이탈리아에 왔다면 참 좋아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 어귀에 앉아 단출한 메시지를 보냈다.

연락을 하지 않던 1년이란 시간은 길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글을 쓰고 지웠다를 반복하다 보니 결국 보고 싶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이 내용의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걸었다.

잘 되지도 않는 핸드폰으로 어떻게 와이파이를 연결했고 어떻게 그 메시지를 적어 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걷는 동안 어깨와 발에 통증은 여전했고 짊어진 배낭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육체의 고통보다 마음의 짐이 더 고통스럽고 무거웠음을 깨달았다.

그 사람이 많이 그리웠다.


늦게 출발한 만큼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답장을 받고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석양길을 걸었다.

그 풍경이 어땠는지는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고 흘려보냈으나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웠다.
걸으면서 떠오른 수많은 생각과 감정, 과거 회상과 회고의 과정이 영향을 준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 연락할 수 있어서 기뻤고, 응당 해야 할 것을 늦었기에 미안했고, 더 늦지 않아 다행이다.

온 힘을 다해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기에 몸과 마음에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자연스러웠다.

가장 힘들 때 가장 해야 할 것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풀려나왔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콜레 디 발 델사(Colle di Val d'Elsa)는 엘사 계곡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콜레 디 발 델사'는 언덕 위에 성을 짓고 그 아래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강을 건너서 광장 쪽으로 향하자 여기저기 노랑 풍선과 띠가 장식돼 있었다.

노란색이 도시를 상징하는 색인가 보다.

시에나는 성안에 있는 중세시대 마을 느낌이었는데 이곳은 성 밖에 모여 사는 소규모 마을 느낌이다.

숙소 위치를 찾기 위해 말을 걸을 때마다 사람들은 몹시 다정다감하게 도와줬다.

문제는 아고다를 통해서 B&B를 예약하고 왔는데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려도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옆집 개만 인기척을 느끼고 짖었다.

도보 여행을 연속하면서 거대한 배낭을 메고 25km를 걷는 것은 몸이 정말 힘들다.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버티던 의지마저 풀어놓았기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계단에 주저앉았다.

40분가량을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광장으로 나와서 젤라토 가게로 들어갔다.

고소하고 진한 피스타치오와 초코를 번갈아먹으면서 대안 숙소를 검색했다.

숙소비용을 환불받지 못하더라도 일단 숙박을 해결해야 했다.

광장에서 가까운 호텔을 예약했는데 오히려 지난 숙소에 비해 저렴하고 아늑해 보였다.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피스타치오와 초코 조합을 음미하면서 광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봤다.

노랑 풍선이 가득한 도시에 활력이 있다.

피렌체(플로렌스, Firenze)까지 50km 남은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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