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가 없는 공포
다음날,
빵과 요플레, 과일, 카푸치노까지 호텔에서 제공되는 조식을 든든히 먹고 곧장 짐을 들었다.
통증이 남은 발바닥을 딛으면서 호텔 밖으로 나왔는데 사방에 노랑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등에 스탭이라고 써진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자 저녁에 축제가 시작된다며 한쪽을 가리켰다.
'La Notte Gialla'. 오늘 진행되는 축제다.
어제 본 노랑 풍선들과 띠가 이 축제를 위함이었다.
이 유쾌한 스태프들은 주변 동료들을 모으더니 내 여행 이야기를 묻고 도보 여행 중이란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나를 축제로 초대했다.
충분히 쉬고 걷는 게 좋다고 했고, 여행 중 이런 축제를 만나는 건 행운이라고도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나무 사이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이벤트 부스와 무대를 준비하는 모두가 싱글벙글하다.
대학교 축제 현장에 온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준비하는 사람 대부분이 자원봉사하는 학생이었다.
광장 주변과 골목 여기저기에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들도 자신의 가게 앞을 꾸미고 있다.
마을 규모가 크지 않아서 마을 주민이 스텝이고 참여자고 가게 주인이다.
피렌체 방향으로 1km를 앞으로 가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길을 되돌아왔다.
‘콜레 디 발 델사’에서 하루를 더 머물 생각이다.
도보 일정에 맞춰 이틀 뒤 피렌체에서 후배를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나름 갈등 속에 큰 결심을 했다.
같은 숙소로 돌아가니 체크아웃할 때 '차오'를 외치던 호텔 직원이 다시 돌아온 나를 몹시 반겼다.
이탈리아 최고의 축제를 놓치고 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며 웃는 그에게 나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축제 특선 요리를 선보이는 식당에 가서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기고, 저녁에는 또 다른 식당에 가서 파스타와 와인 한잔을 더했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와인 생산지 토스카나다.
어린아이부터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까지 온 동네 아이들이 나와 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어른들은 준비했다.
배구, 농구, 스케이트, 테니스, 펜싱, 인라인 등의 운동 경기가 광장에서 진행되고 어른들은 돌아가며 심판을 본다.
동네의 상인들이 거리로 나와 물건과 음식을 판매하고 팝콘과 맥주, 와인, 레몬 첼로 등을 여기저기서 만끽할 수 있다.
사방이 노랑 물결이고 강아지까지 노랑 색상을 둘렀다.
이 작은 마을에 이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준비하고 즐긴다.
광장 외에도 마을 전체 공간을 활용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됐는데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좋아해서 각종 밴드 공연을 쫓아다녔다.
이 축제가 준비되는 아침부터 노래와 춤이 있던 밤까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 순간 모두를 눈에 담았다.
이 축제를 준비하고 즐기는 모든 과정 속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부러웠다.
오래전부터 축제를 준비하면서 쏟았을 노력과 시간, 즐거움을 나도 겪은 적이 있다.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침에 만난 스텝들을 보면서 나의 오래전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내 광장에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담았다.
이곳에 하루 더 머문 대가로 다음날 25km를 걸은 뒤 도착한 마을에서 3번째 도보 경로를 마무리했다.
걷는 동안 많은 차량이 멈춰서 태워주겠다고 했다.
한 번은 멀리서 차가 멈추더니 남자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말에 걷기 위한 여행임을 설명하고 정중히 거절했지만 정말 고마웠다.
혼자 고된 여행을 하는 동안 외로움과 동행해야 하고 어디에도 소속돼있지 않기에 누군가의 관심과 온기가 감사하다.
하루 더 쉬고 난 뒤의 발걸음은 몹시 가벼워서 25km 지점에 전날보다 힘들지 않게 도착했다.
걷는 동안 토스카나 풍경은 몹시 아름다웠고 그렇기 때문에 3차 도보 구간을 종료하며 피렌체로 향하는 버스를 탈 때 많이 아쉬웠다.
걸음으로 겪을 수 있는 것을 버스에게 뺏긴 느낌이었다.
피렌체에서 지인과 해후하고 볼로냐로 가는 버스 출발시간이 늦어서 기다리고 있다.
이탈리아 도보 여행 마지막 구간은 볼로냐 외곽에서 모데나까지 50km 구간이다.
베로나, 베니스처럼 가보고 싶은 도시가 있지만 이번 이탈리아 여행은 도보에 중심이 있다.
줄곧 그랬다.
그리고 이 도보여행이 이탈리아를 내게 보여주고 있다.
피렌체에서는 후배를 만나고 관광 명소와 맛집을 돌아다니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역사를 간직한 도시 사이로 적당한 폭의 강이 흐르고 그 모든 풍경을 미켈란젤로 언덕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 피렌체의 낭만이었다.
버스를 타고 볼로냐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숙소는 정류소에서 6km 떨어진 시 외곽에 있었다.
도시에 도착해서 숙소까지 걷는 것은 매번 반복된 패턴이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둠 속을 걷는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가로등 하나 없고 사람과 자동차마저 지나가지 않는 곳을 걸어갈 때는 작은 소리에도 반응했고,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길 옆을 걸을 때는 무섭고 외로웠다.
둘러볼 수 있는 풍경이 없으니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지도와 도로만을 유심히 살피며 갔다.
비교적 가로등이 많고 지나다니는 사람과 차가 많은 시내에 비해 시 외곽의 밤은 어둡고 음산했다.
낯선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는다는 건 생각보다 실체가 없는 공포와 싸워야 한다.
숙소는 매우 좋았다.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노 부부는 시간이 늦었는데도 도착하지 않아서 걱정했다며 따뜻하게 맞아줬다.
이들은 아파트 1층에 거주하면서 2층을 에어비앤비로 활용하고 있었다.
네 개의 방 모두 다른 여행자들이 사용하고 있다며 사용할 방을 안내해주시고는 다시 본인들의 집으로 내려가셨다.
볼로냐 중심에서 꽤 먼 곳이지만 가격과 실내 모두 훌륭한 숙소다.
곧장 샤워를 하며 긴장된 몸을 풀고, 가방에서 마지막 남은 신라면을 꺼내어 주방으로 갔다.
물을 끓이고 면과 분말 수프를 넣자 익숙한 라면 냄새가 확 풍겨오며 순식간에 입에 침이 고였다.
그리고 갑자기 주방 옆방에서 기침이 시작됐다.
콜록이는 기침소리는 점점 퍼져갔다.
옆방, 그 옆방, 이 층에 모든 사람들이 기침을 할 때쯤에야 신라면 냄새가 이들에게 너무 맵다는 걸 깨닫고 주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서둘러 먹고 치워야 이들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아직 다 익지 않은 꼬들한 면을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