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문장들 6

by 김창훈

세상일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연결돼있는 걸까.

트레킹 시작점인 tyssedal에 주차를 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 달려와서 붙잡는다.

돌아보니 jorpeland에서 만난 한국인 가족이다.

반가워서 인사를 건넸는데 자신들의 차를 타면 상부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며 일단 차에 타라고 한다.

어리둥절해하면서 차에 올랐다.

하부 주차장에서 상부 주차장까지 4km 거리인데 상부 주차장에 갈 수 있는 차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기다렸다고 한다.

이제 막 상부 주차장 출입이 오픈되려 하는데 지나가는 뒷모습이 왠지 나인 것 같아서 달려왔다고 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나름 새벽에 일어나서 살뜰하게 밥까지 챙겨 먹고 나왔는데 이런 정보는 하나도 없이 밥심만 챙겼다.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트레킹인데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왔냐며 먹을 것은 있냐는 연이은 물음들이 수다스럽고 따뜻했다.

상부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트레킹과 연관 없고, 삭막한 자갈길을 굽이굽이 4km 올라가야 한다.


등산복, 등산화, 스틱과 가방, 간식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춘 가족은 함께 가자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분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Trolltunga를 정복할 수 있었다.

가는데 세 시간 반, 오는데 세 시간 반, 정상에서 한 시간 총 여덟 시간이 소요됐다.

함께 올라가자고 하셨는데 뒤쳐지거나 짐이 되고 싶진 않아서 정말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하산하는 길에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발도 막 딛고 신발도 헐렁한 운동화인데 몸으로 이겨내 버린다며 젊음이 좋긴 좋다고 하셨다.

그저 모든 게 등산 전문가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Trolltunga은 트롤의 혀라는 뜻이다.

혀가 내밀어진 모양과 같은 바위가 산 위의 호수 방향으로 돌출돼있다.

트레킹은 이 돌출된 바위 위에 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오랜 시간 고생해서 도착한 만큼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한 명씩 Trolltunga 위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는다.

나 역시 그 위에서 앉고 서고 엎드려서 사진을 찍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던 길 중에 좌우로 호수가 내려다 보이던 지점이 더 좋았다.

그곳은 경사면에 잡초들과 각종 야생화가 피어있어서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 같았다.

몹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하부 주차장까지 내려왔을 때 해는 매우 쨍쨍했고 발은 피곤하지만 몸은 조금 더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다.

나도 부모님과 함께 오고 싶다고 말을 건네니 형은 한번 같이 와보면 다시는 그런 생각이 안 들 거라고 했다.

가족 모두에게 거듭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리고 남은 여행도 잘 마무리하시길 응원하며 돌아서려 하는데 어머니께서 자신들의 여행은 이제 마무리됐다며 남은 반찬을 챙겨주시겠다고 하셨다.

짊어지고 있던 작은 가방에 참치, 김, 스팸, 햇반, 깻잎 통조림, 고추장을 넣어주셨다.

어머니께서 첫인상이 너무나 좋았다고 하셨다. 팔을 잡으시며 건강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도 하셨다.

모든 게 돌고 도는 느낌이었다.


바로 베르겐으로 이동하려다가 이곳에 하루 더 머물면서 경험을 갈무리하고 몸을 회복하기로 했다.

세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거리지만 하루에 1곳씩 3일 동안 트레킹을 했으니 모든 것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다. 속도 조절을 하는 게 좋겠다.

휴식에는 1인실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호스텔로 돌아가지 않고 저렴한 호텔을 예약했다.

늘 그렇듯 먼저 빨래를 해서 널고, 햇볕 아래 앉았다. 찬란한 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방학에 들어간 지도 이미 몇 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아직까지 기숙사에 남아 있는 건 우리 둘 정도였다.

날이 저물자 기숙사는 휑하니 마치 폐허처럼 느껴졌다. 국기가 게양대에서 내려지고, 식당 창문에는 전등이 켜졌다. 학생 수가 줄어든 탓에 식당 전등은 늘 반 정도만 켜져 있었다. 오른쪽 절반은 꺼지고, 왼쪽 절반만 켜져 있었다. 그래도 희미하게 저녁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크림 스튜 냄새였다.

누군가 걷어들이는 것을 잊어버린 흰 셔츠만 빨랫줄에 널려, 무언가의 허물처럼 해 질 녘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약간 이지러진 하얀 달이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오른쪽에는 신주쿠 거리의 불빛이, 왼쪽에는 이케부쿠로 거리의 불빛이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선명하게 빛의 개울을 이루며 거리에서 거리로 흐르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소리가 서로 어울린 부드러운 울림이 마치 구름처럼 희미하게 거리 위에 떠돌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내 스무 살 대학시절에 많은 날이 지나가는 불빛과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학교로 나가 강의를 듣고 공강 시간에는 도서관에 가거나 친구들과 밥을 먹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난 뒤 저녁까지 공백 시간에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석양이 물들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열아홉 살과 스무 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내 청춘의 하루가 이렇게 허무하게 흘러가는 것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있다 보면 여섯일곱 시쯤에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희희낙락 거리며 서로를 놀리다가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로 하루가 끝났다.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으나 어디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정신 차려보면 늘 고민 사거리에 서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일단 다들 그 사거리에 서서 고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그곳이 청춘의 갈림길 같았다.

늘 새벽 세시에는 ‘청춘을 적신다’에 있었다.

그 시간까지 문을 여는 유일한 술집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청춘을 적신다’가 사라진 것을 보고 시절의 일부를 상실한듯한 느낌을 받았다.

찬란한 시간은 계속 연속되고 있었으나 늘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친구 놈들은 신기하게 만났다.

새터에 가서 록이를 만났고, 오티에 가서 건이랑 진우를 만났다.

나를 매개로 넷이서 뭉쳐 다니다가 민이와 구디를 동아리에서 만났다.

나까지 이렇게 여섯이 가장 친하고 한심하다.

첫 개강도 하기 전인 2월, 오티가 끝나고 술집에 쭈뼛거리며 모인 아이들은 아직 고등학생티를 못 벗은 순박한 얼굴로 앉아서 많은 선배들과 친구들을 사귀고 대학의 낭만을 시작할 기회라고 여겼던 것 같지만 나는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온통 사내놈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어느 테이블이든 그곳에 함께 앉은 사람과 놀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산에서 온 진우, 영건이는 그렇게 만났다.

나와 생각이 통했는지 다른 테이블을 아랑곳하지 않고 셋이서 술을 마시고 따로 나와 노래방에서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새터에 갈 때쯤 나는 완전 고삐가 풀려있었다.

수능이 끝난 뒤 아버지 김철수 씨에게 속아 배추 아르바이트를 하고 모은 돈이 있었고, 지난 6년간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신입생 1년은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놀겠다고 선언하고 온 길이었다.

새터라는 명칭의 엠티에서는 신입생들이 5개의 조로 나뉘었고 조당 스무 명 정도의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속한 조는 순박한 햇병아리들과 1명의 양아치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특별히 재밌을 것이 없었다.

남자가 18명에 여자가 2명인 성비가 앞으로 4년간 내가 속해있는 학과의 현실이라는 것에 마음이 어지러울 뿐이었다.

순박한 햇병아리들은 그나마 양아치 친구가 재밌게 해 주길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고등학생 양아치가 대학생 양아치가 됐을 뿐 그도 껄렁껄렁하고 윽박지르는 것을 제외하면 대학생으로서 어떻게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지지부진한 시간이 지나고 저녁에 술이 들어가면서 비로소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나 둘 취해가고 생애 첫 술을 마시는 아이도 있었다.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헤롱이는 애들과 희희낙락 거렸다.

방을 돌며 친목을 다지던 학생회 선배들을 맞이하고 술을 받고 배웅도 했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를 잡고 토하다 잠든 록이를 구출하고 방광이 한계에 달한 아이들도 구원했다.

음주에는 가무가 따라야 한다는 게 당시 나의 지론이었던지라 취한 아이들을 데리고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불을 끄고 누워서도 낄낄거리며 한참을 더 노래를 불렀다. 늘 내가 선창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엔 제대로 청춘을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밤을 보내고 나니 같은 조였던 친구들 사이에선 일약 스타 덤에 올랐다.

아이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시커먼 남자애들 틈에서 더 놀 생각이 없었다.

뭔가 내 스무 살에는 특별한 일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대학생활에 뭔지 모를 낭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개강하고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낭만은 동아리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진우, 건이, 록이와 교내의 동아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는 그것에 열정적이었으나 모든 대자보를 읽고 이 학교에 낭만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럴 바에야 운동이나 하자 싶었다.

마침 진우는 인간병기로 만들어준다는 태권도 동아리 대자보를 맘에 들어했다.

뭐든 좋다는 생각으로 태권도 동아리 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가던 길에 도복을 입은 청년들이 달려 나와 잔디밭에서 발차기하는 것을 보고 돌아섰다.

딴에는 신입 부원을 모집하기 위한 퍼포먼스였겠지만 내 눈에는 대학생활 동안 가서는 안될 곳을 본 느낌이었다.

결국 우리가 들어간 곳은 봉사 동아리였다.

새터 때 방을 찾아온 학생회 선배가 봉사 동아리 임원이었다.

그때 선배가 동아리를 권유하며 했던 말 중 "봉사만 하는 건 아니야"라는 말이 결정타였다.

그때는 사실 어디여도 좋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선배가 아직도 카톡 단체방에 있으면서 이따금 술 한잔 같이 하는 지영이 누나다.


여름방학이 되자 친구들과 선배들은 저마다 고향으로 내려갔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 또한 학교에 오지 않았다.

기숙사와 학교, 학교 앞 식당가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회색빛 죽은 도시 같았다.

모든 곳이 휑했다.

무슨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광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타지 생활을 하다 돌아온 아들을 살 찌우기 위해 엄마는 부지런히 집밥을 해서 먹였고 당시 키우던 애완견 해피(갈색과 검은색 털을 가진 귀엽고 순한 요크셔테리어)가 손과 얼굴을 핥고 부비며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 것도 없이 사랑받고 있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전남대학교 후문이나 시내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분명 그때까지도 우리는 대학생이 되지 못한 고등학생들이었다.

친구들이 반년도 채 안된 시간 동안 서울말을 배워왔다며 재수 없다고 놀려댔지만 서울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며 놀림을 받아온 터라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스마트폰도 카톡 단체방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이들과 서로 소식에서 자유로웠다.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든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광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무등산 꼭대기를 거실 창문을 통해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쉬는 날이면 아빠가 창밖을 보던 것과 같았다.


두 달이 조금 넘는 방학은 빠르게 지나갔다.

스무 살의 일부가 이런 형태로 지나간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다.

방학이 아직 남았을 때 서울로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엄마는 아무도 없는 학교에 빨리 가서 뭐할 거냐고 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 아무도 없는 기숙사 이층 침대에 누워있을 때까지 모든 것이 기억난다.

버스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문이 열리면서 나던 서울의 냄새, 지하철을 찾아가던 길, 흔들리는 지하철, 지하철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지나가는 차와 가로등의 어지러운 불빛, 달달한 서울 김치, 헛헛함과 외로움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주체되지 않던 마음까지 모두.

내가 굉장히 찬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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