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야 한다
봉사가 없는 태국 휴일에 봉사자들을 위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교육봉사팀과 아침 회의를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와서 가장 좌측의 차에 올라탔는데 기묘하게도 다수의 동양인 아이들이 몰려있다.
이들 중 말을 붙여본 사람은 한국인 친구 영현이 뿐이다.
영현이는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왔고 노력봉사(Outdoor)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잠깐 만나지만 금세 친해졌다.
그 짧은 교류가 없었더라도 친해졌을 것이다.
그게 타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이다.
영현이를 포함해서 동양인 아이들이 한 차에 몰려있는 게 의아해서 물어보니, 영어 실력이 좋지 못해서 서구권 애들과 함께 차에 타는 게 불편하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차에 오르는 것을 피하다 보니 한쪽에 몰린 것이다.
왠지 엔드류 이 얌생이 같은 놈이 옆 차로 뛰어가더라니 이 차에 동양인이 몰려있고 옆 차에 그동안 친해지고 싶었던 처자들이 탄 것을 본 게다.
며칠 전부터 스페인, 이탈리아, 멕시코에서 온 신규 봉사자들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다른 팀 봉사자와 교류할 시간이 아침, 저녁을 먹을 때 밖에 없기에 그 갈망도 이해된다.
일과 중엔 봉사 팀별로 차를 타고 이동하고, 봉사가 끝나면 회의와 저녁시간이 연속됐기 때문에 사실상 대부분의 시간을 팀별로 보내왔다.
유명하다는 사원 주차장에 차가 멈추고, 저마다 사진을 남기기 위해 떠난 자리에 '매기'는 혼자 남아 내리지 않았다.
카메라를 어깨 한쪽에 걸고 사원으로 가다가 뒤돌아서, 차에 남아 책을 읽는 그녀를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다가 사진으로 남겼다.
‘안 볼 수도 있구나, 그 순간에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택해서 할 수 있구나.’
트럭 뒤에 발을 걸치고 멀리 보이는 사원을 마주 한 채로 책을 보며 상념에 잠긴 모습이 이 장소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자유롭고 즐거워 보였다.
매기는 봉사 캠프에서 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힘차게 차 안으로 뛰어올랐다.
참 건강한 발걸음이었다.
처음엔 동양인 봉사자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봉사자를 하나로 모았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그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잠시 일을 멈추고 봉사를 하기 위해 타국으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고, 스리랑카는 너무 멋진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다양한 질문을 했다.
일과 여행과 봉사를 반복해 온 그녀의 말에는 힘이 있었고 미소는 밝고 따뜻했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전체 봉사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노력봉사(Outdoor)를 신청해서 매일 온몸에 진흙을 묻히며 제 몫을 해내고 봉사자들을 독려해서 노력봉사팀 내에서 인망이 높다는 말을 영현이를 통해서 전해 들었다.
매기에 대한 인상이 깊게 뇌리에 남았다.
밝고 자신 있는 미소와 말, 어디에서나 자연스러운 책 읽는 모습, 짊어진 배낭의 크기도 작아 보일 만큼의 그 건강함을 남기고 그녀는 그 주에 다른 나라로 봉사를 떠났다.
그녀를 만난 동질감 때문일까 그 차에 동승한 사람들과 온종일을 함께 했다.
사원 투어에서 돌아와 캠프의 오두막 쉼터에서 쉴 때도, 떠나는 봉사자들을 위한 파티에서도, 이후 봉사 일과 중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도 함께 했고, 주말에 함께 치앙마이에 다녀오기도 했다.
많은 봉사자들이 주말에는 밖으로 나간다.
오토바이를 타고 골든 트라이앵글(태국, 미얀마, 라오스 국경)에 다녀오는 친구들도 있고, 가깝게는 치앙라이 읍내의 게스트 하우스에 머무는 친구들도 있다.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많은 치앙마이 여행은 무척 즐거웠고, 다사다난했다.
주류를 판매할 수 없는 기간이 태국이 있는 줄 누가 알았을까.
필리핀을 떠난 이후 타인과 함께 하는 여행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함께 다니기에 즐겁고 함께 하기에 신경 쓸 것들이 생겼다.
치앙마이 여행을 선동한 책임의 무게를 짊어지며, 혼자 나왔지만 어느새 또 사람들 틈에 서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심하고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나온 여행이다.
불과 몇 달 전 인천공항에 서서 혼자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하던 때가 있었다.
기약이 없는 긴 시간의 여행, 가본 적 없고 알지 못하는 세상, 짜여있지 않은 일정으로 자고, 먹고, 이동해야 하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고, 그 자리에 있기까지의 내가 그 뒤에 서있었다.
공항으로 배웅 나온 재훈이가 없었다면 나는 그 먹먹하고 막막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공항에서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을 위한 결정이 기대되면서도 무섭고, 결단에 마음이 후련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엉켜 벅차올라 가슴이 뻐근했다.
혼자에 대한 생각을 하면 늘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의 내가 떠올라 애잔하다.
중요한 순간에 나는 늘 혼자였다.
형제자매는 없고, 부모님은 건강과 재정, 미래에 짓눌려 주변을 볼 틈이 없었다.
좋은 벗은 많았지만 가치관을 나누고 이해받을 이가 드물었고, 그런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꺼내야 할지 모를 만큼 나조차 혼란스러웠다.
때론 누군가에게 내 말을 건네는 것이 그를 설득해야 하는 것처럼 돼버려 피곤했고, 내 가치관을 지켜나가기 급급했다.
스스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며 여기까지 왔다.
나에겐 내가 스승이자,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세계를 여행하는 중의 경험이 귀하지만 그보다 여행을 결정하기까지 고민하고 방황하며 끝내 결단한 그 시간들이 더 귀하다고 생각해서 여행의 시작을 늘 되새긴다.
이때의 과정이 내 여행을 단단한 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다.
여행을 다녀오려 한다며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 멋지다며 응원해 주던 아빠 옆에서 소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흙빛이 된 엄마의 얼굴도 늘 기억에 간직하고 있다.
가족 간에도 각자가 가진 삶의 방향과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방향은 다르지만 엄마는 늘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내가 가는 길과 방황이 내가 잘되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게 엄마의 행복이 될 것도 믿어야 한다.
크게 지지받지 못해도 어쨌거나 내겐 가족뿐이다.
엄마는 늘 전화를 끊을 때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아들아 다 잘 될 것이다.” 수화기에서 멀어지는 혼잣말이다.
엄마는 나를 그렇게 키워왔다.
서울에서 수술 후 경과를 확인하고 나오던 광화문 길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대화를 마치고 끊으려던 그 전화기에서 “아이 좋아라” 하는 소리가 멀어지며 작게 들렸다.
광화문 대로를 건너는 그 횡단보도 길 위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 ‘아이 좋아라’ 그 혼잣말이 너무 따뜻해서 우두커니 선채, 이제는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그 말을 따라 했다. “아이 좋아라.”
내가 아무 이상 없어서 우리 엄마는 좋다. 나도 좋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행복하다 느끼는 많은 순간들 역시 엄마의 행복이 될 것이다.
치앙마이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앞서 치앙라이로 출발했다.
홈스테이 봉사를 위한 회의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영어 실력도 모자란데 회의에 늦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틈틈이 즐거운 순간을 보내되 봉사와 관련된 것을 놓쳐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여행 중 봉사지에 온 본질이고 그곳에서 도전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