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밤이 시작될 것 같다

교류

by 김창훈

열려있는 문밖을 보고 어쩐지 마음이 느슨해졌다.

열기가 가득한 베트남의 오후는 늘 이렇게 느슨하다.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볼 생각으로 문 밖으로 나왔다.


습도 때문인지 필리핀보다 더 덥게 느껴졌지만 무더위 속 낯선 마을을 느슨히 걷고 있는 기분이 꽤나 마음에 든다.

얼마 걷지 않아서 길가의 쌀국숫집을 발견하고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신짜오~!" 준비한 인사말을 이제야 던져본다.

베트남어로 적힌 메뉴판을 읽을 줄 모르기에 '포'라고 연거푸 말하며 손가락 하나를 펴고서 멋쩍게 웃다가 주인 내외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옆사람이 먹고 있던 쌀국수를 가리켰다.

퍼보, 소고기 쌀국수다.

환하게 웃는 것을 보니 다행히 제대로 주문된 것 같았다.

베트남어에는 6개의 성조가 있기 때문에 성조에 따라 발음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소통이 어려운 듯했다.


잠시 후, 지금까지 먹은 그 어떤 쌀국수보다 진한 육수의 쌀국수가 나왔다.

매운 베트남 고추와 고수를 넣고 꿧이라는 열매를 짜서 상큼함을 섞은 뒤, 약간 꼬릿 한 향이 날 정도로 진하게 우려낸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좋다' 하고 있으니 주인 내외분들께서 웃으시면서 나를 바라본다.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다는 표정이지만 나로서는 제대로 된 맛을 볼 수 있어서 황송할 따름이다.

대화를 시도해보려 했으나 영어를 전혀 모르시는 듯해서 연신 엄지를 세워 맛있음을 표현했다.

고추를 넣자 고추를 더 가져다주시고, 땀을 흘리자 선풍기를 내쪽으로 맞춰주시고, 꿧을 짜려고 하자 먹을 줄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시니 웃음이 절로 났다.

그 푸근함이 좋았다.

베트남의 끼니는 먹고 돌아서면 사라질 정도로 부담 없는데 특히 쌀국수가 그렇다.


식당 옆에서 달달한 쓰어다 커피까지 한잔하고 숙소로 돌아오자 봉사자 한 명이 반갑게 맞아주며 우체국에 가려는데 같이 나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봉사자와의 최초 교류였다.

프랑스에서 왔고 한 달간의 봉사 일정을 마치고 곧 돌아간다며 운은 뗀 그는 베트남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더불어 좋은 세탁소와 괜찮은 빵집, 시장 등 이 동네의 정보를 사십 분가량의 발걸음에 전달했고, 시장에서 사과를 구입하는 모습까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는 다음날 아침 프랑스로 떠났다.

그날의 정보는 대단히 명료하고 유용해서 1달간의 베트남 생활을 뒷받침했다.

기묘한 사람, 기묘한 만남이었다.


숙소는 봉사지에서 복귀한 봉사자들로 북적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외 봉사를 왔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있거나 혼자 심각해 있는 이들에게 어찌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배정받은 캐비닛에 짐을 풀고 있으니 야푸와 바티스라는 두 청년이 다가온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들이다.

이들이 베트남을 떠날 때까지 대부분을 함께 했다.

야푸는 중국계 프랑스인이고 중국을 싫어한다.

여행하면서 중국 여행자들과 수차례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건넨 첫마디는 '중국인이니?'였다.

그는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사실보다 마음껏 중국인을 흉볼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밝을 때는 대체로 자고 어둠과 함께 일어나는 사나이어서 야푸가 사용하는 침대 옆 커튼은 밤이 돼야 열린다.

늘 눈을 삼분의 일쯤 감고 있어서 퇴폐적인 느낌이고 좋아하는 건 술, 담배, 여자지만 대부분의 것에 무관심하다.

바티스는 바르고 붙임성 좋고 활발하다.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를 닮았고 큰 키에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탓에 봉사자 대부분에게 인기가 좋다.

어느 반에나 한 명쯤 있는 성격 좋은 친구와 같다.


이들과 더불어 스페인에서 온 3명의 남녀가 봉사자 무리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스페인에서 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쾌활하고 유머러스하고 준수하다.

셋이 형제자매라고 해도 될 만큼 흡사하게 엘프를 닮아서 나는 이들을 레골라스 패밀리로 칭했다.

그 외의 봉사자들은 둘 혹은 셋이서 왔고 노르웨이, 영국, 헝가리, 벨기에 등의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의 아메리카에서 왔다.

봉사기관을 운영하는 베트남 현지 스태프들과 인턴 과정으로 참여 중인 첸과 징을 제외하면 봉사자 중에 아시아에서 온 사람은 나 혼자다.

첸은 캄보디아에서 징은 미얀마에서 왔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서구권에서는 누구나 영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인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능수능란하게 영어를 사용했다.

국가에 상관없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가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볼 때면 신기하고 부러웠다.


통성명을 마친 야푸와 바티스가 오늘 저녁이 몹시 별로라며 밖으로 나가지 않겠냐고 했다.

마침 출출하던 터라 흔쾌히 응하고 방을 나섰다.

숙소 앞에 세워진 두대의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나는 바티스 뒤에 앉아 전달받은 헬멧을 썼다.

대단한 밤이 시작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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