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의 그 너그러움과 애틋함으로
아이슬란드 여행은 노르웨이 여행과 많은 부분에서 대척점에 있는데 특히 아이슬란드에서는 동행하며 타인의 생각과 삶을 접하게 된다는 것에서 차이가 크다.
한국을 떠난 후 몇 개월 동안 나 이외에 다른 이들의 삶이나 타인의 시선을 머리에서 제외한 채 지내왔다.
그동안 내가 채우고 변화한 것들은 어떤 것이고 현재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다가 이곳에서 관계를 맺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도치 않게 현재의 나를 더 알게 된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은 타인의 틈에서 쉽게 드러났다.
여전히 경이로운 다이아몬드 해변에서 맏형은 드론을 띄워 올렸다.
프로펠러가 회전하는 소리에 사람들은 고개를 위로 올렸고 나는 드론이 송출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드론을 따라 시선은 올라가고 이내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됐는데 시선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 사실이 매우 놀랍고 감명 깊었다.
땅에서 수평으로 봐야 했던 지형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되자 내내 눈을 사로잡던 빙하의 조각들에서 벗어나 전체의 아름다움을 머리에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검은 모래와 청록색의 바다는 해변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로 인해 극명히 구분되고 있었고, 바다와 육지는 생각보다 더 먼 곳까지 그 영역을 갖고 있었으며, 육지의 먼 곳에서 피오르드와 빙하, 크고 작은 산들이 우두커니 선채로 이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높은 상공에서 360도 회전하며 주변을 둘러본 드론은 요쿨살론 상공에서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내려다본 호수는 그 자체로 다큐 영상에서 보던 북극과 같았다.
큰 빙하 조각들로 인해 볼 수 없던 풍경을 위치의 제약에서 벗어나 가려진 것뿐만 아니라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내가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저마다 흩어져서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맏형은 드론을 착륙시키고서 비탈에 앉아 그 빙하 조각들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회픈(Höfn)을 떠나 비크이뮈르달(이하 비크)까지 가는 것이 여정인 날이었는데 요쿨살론을 시작으로 남부의 지형들은 대부분 평지로 시야가 트여 있어서 눈이 편안했다.
지명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누군가 차를 멈추고 싶어 하면 언제든 차를 멈춰 세우고 바닥에 앉거나, 앞으로 걷거나, 풍경을 보고 서있기 일 수였다.
한 번은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비탈길을 내려가 강가를 거닐었다.
남부에 흐르는 강물은 빙하로부터 흘러오는지 그 색이 시리게 푸르렀고 파랑과 흰색, 남색, 보라색이 뒤섞여 오묘했다.
우두커니 서서 강물을 보는 동안 마음이 평화로웠다.
굉장히 안정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끝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이 다가오면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더 많이 인내하고 또 포기할 수 있게 된다.
이전까지도 배려가 넘치는 여행이었으나 이제는 포기와 이해, 수용 등으로 마음이 넉넉해서 배려라는 노력조차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마지막이란 그런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움켜쥐고 또 움켜쥐려 하는 많은 것들도 죽음이나 그와 같은 마침표를 앞에 두고서야 진정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것처럼 분명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 분명한 이 진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루의 삶 중 가장 배척되어 있다.
죽는다는 것과 그 순간은 예고 없이 닥쳐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죽음이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고 멀게만 느껴지는 탓이다.
아무튼 우리는 마지막의 그 너그러움과 애틋함으로 좋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비크에는 검은 모래 해변과 주상절리 절벽이 있었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주상절리 육각기둥 위에 앉고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 명물보다 광활한 검은 모래 해변과 바다 풍경에 눈길이 갔다.
큰 파도가 거칠게 밀려와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내 생애 가장 역동적인 바다였다.
나는 바다를 향해 고함을 질렀지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저마다 탐방을 마치고 곁으로 온 일행들도 그런 파도를 보며 소리 질렀지만 바로 옆사람의 외침 소리조차 아득히 멀게 들리다가 이내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파도에 휩쓸리면 당장 해변 위에서 사라져 바다로 끌려갈 것만 같았기에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 몸이나 발을 담글 엄두를 내지 않았다.
부서진 파도가 모래사장의 깊숙한 곳까지 밀어 올리는 포말에 발을 가져다 대는 여행자들은 더러 있었다.
이 검은 모래가 있는 해변(실은 자갈이 대부분인 해변)은 레이니스피아라(reynisfjara)라고 했다.
어떤 걱정이나 마음의 티끌도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에선 부질없는 일이었다.
정말 여기까지 와서 저 파도에 마음의 티끌을 털어버리지 못한 이가 있다면 참으로 한심하다.
개운함으로 비워진 마음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해 지는 바다는 불 지핀 장작처럼 시선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서 하염없이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파도가 부서지지 않는 틈 사이로 여행자들의 웃음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들리는 듯했다.
해변에서 멀지 않은 들판에 우리만 사용하는 작은 독채 오두막이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열쇠를 들고 가는 길에 보이는 불 꺼진 오두막이 이미 불이 켜진 채 반짝이는 것처럼 생각될 만큼 몹시 반가웠다.
레이캬비크를 떠난 첫날 게르시 근처의 오두막에서 여행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보내던 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인지 곧장 짐을 풀어두면서부터 우리는 몹시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노래했다.
친구들과 함께할 때면 작은 공간에 밀착하여 모여있는 것을 좋아한다.
세련된 식당의 넓은 사각 탁자보다 허름한 술집의 철판 원형 탁자가 좋고, 넓은 펜션보다 작은 오두막이 나는 더 좋은 것이다.
여행이 링로드처럼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시작점에 선듯한 기분이 들었다.
습관처럼 확인하는 오로라 사이트를 통해 이 밤에도 오로라가 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부의 맑은 하늘에 오로라 지수는 높고 주변은 허허벌판으로 불빛이 없으니 문 밖으로만 나가도 오로라를 관측하기 용이한 곳이었다.
내내 웃고 즐기는 동안 이따금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막내와 맏형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오면 오로라가 뜨는지 알 수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창밖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오로라가 하늘에 떴음을 발견했을 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오로라 하늘 아래 넷이 사진을 남기기 위해 문밖으로 나섰다.
불빛이 없는 들판으로 걸어 나가는 길에 다른 독채 오두막 창문 밖에서 하늘을 가리키며 오로라가 떴음을 알려줬는데 그들이 문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고 크게 놀라는 탓에 마음이 더 밝아졌다.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는 것이 이런 건가 보다 했다.
맏형 카메라를 들고 벌판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넷 다 취해있었기 때문인지 도무지 초점이 맞질 않았다.
바람이 불고 들판의 땅은 물러서 고정되지 않는 탓도 있었다.
사진을 잘 찍는 것보다 함께 오로라를 보고 그 순간을 즐기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맘때쯤에서야 다른 일행들도 사진의 욕심을 내려놓고 온전히 즐기는 듯했다.
우리가 숙소로 다시 들어와 시끌벅적하는 동안에도 옆 오두막의 청년들은 오로라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로라는 처음 나타난 이후로 희미해졌다가 선명해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오로라가 하늘에 선명해질 때마다 그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하늘에 오로라가 다시 떴다는 것을 알려줬다.
들리지 않은 말을 오두막 안에서 전하며 그저 손을 흔들며 웃었다.
오로라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그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들의 반응 자체가 오로라와 다를 바 없다는 내 생각에 다른 일행들도 동의하는 듯했다.
술이 돌고 꽤 긴 여행 동안 각자의 이야기를 꺼낸 만큼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었는데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산 사람들이 이십 대 초반의 막내에게 하는 말이 참 많았다.
형들이 하는 말들이 무슨 말인지 왜 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나까지 말을 얹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 역시 삶을 고민하고 발버둥 치는 동안 이따금 내 이야기를 할 곳은 필요했지만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럴싸하고 멋진 말들도 결국 그들의 의견이지 내 내면의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음 사람에게 또 다음 사람에게 넘어갔는데 그 무렵엔 얼큰하게 취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속에서 나는 하나의 말을 정말 분명하게 듣고 기억했다.
'똑같이 살 거면 왜 사냐 이씨'
그날따라 취한 맏형이 한 말이다.
모두 크게 웃었다.
해변에 부서지던 집채만 한 파도처럼 왠지 시원한 말이었다.
누군가들의 삶에 던지는 말이 아니면서도 누군가의 저항을 받을 만한 말이기에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이 아닌가.
어쩌면 나 자신을 부정하는 말이어서 하지 못한 말 아닌가.
내가 만든 틀, 내 주변이 만든 틀, 사회가 만든 틀, 나라와 문화의 틀, 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둔 틈 속에서 끝없이 발버둥 치는 청춘 넷이 만나서 삶으로써 이런 말을 던지고 있으니 유쾌할 따름이다.
한국을 떠나고 관계와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나에게 온전히 시선을 둘 수 있었다.
특히 태국 봉사를 마치고 유럽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눈을 떠서 다시 잠드는 순간까지 나에게 묻고 스스로 답하며 나를 벗 삼아 여행했다.
세상의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긴 했으나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늘 시선이 나를 중심으로 온전했다.
그런 시간 속에 놓아준 것과 자연히 소멸된 것이 많았다.
내 안에 많은 것이 비워진 뒤에는 새로운 것이 채워지고 다시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여행은 삶과 닮아있어서 늘 방법을 궁리하고 도전하고 탐험해야 했고, 그런 여행 과정의 고됨과 낭만 속에서 나를 더 알게 됐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아이슬란드에서 동행을 하고 이들의 삶과 고민을 듣게 되면서 오랜만에 시선이 나에게서 타인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고, 타인에게 향한 시선을 통해 나를 보게 됐다.
앞으로 길을 걷던 사내가 드넓은 광야에서 어느 순간 방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나에게만 시선을 둔 시간 동안 방향과 내가 선 위치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일행들과 부대껴 다니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과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통해 지금의 나를 알게 된다.
지금의 나와 나의 과거를 되짚고,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되짚고, 비교 아닌 비교 속에 내가 서있는 자리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