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기까지라고 하면

인도 여덟 번째 편지

by 김창훈

덜컥하더니 무게추가 떨어진 것처럼 심리적인 낙하가 있었다.

심리적인 것임에도 내 안의 모든 것이 아래에 있다.

그 상태로 멈춰있다.

숨을 쉬지 않는 동안 세상도 잠시 멈췄다가 이내 일그러졌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것을 느낀다.


큰일이란 생각이 순식간에 치달았다.

다급한 손놀림으로 병원을 검색하고 무작정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 거리를 10분 남짓으로 어림잡아 걷는 동안 확인한 정보에 병원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

조금 더 멀리에 있는 마하트마 간디 병원으로 가기 위해 릭샤에 탔다.

인도에서 간디라는 이름이 들어간 곳이면 기본적으로 신뢰할만하다는 정보를 기억한다.

좌석의 난간을 손으로 꽉 쥐었다.

울렁이는 속과 흔들리는 몸 중 어느 것을 지탱했는지 알 수 없었다.

릭샤가 시장 옆을 통과하는 동안 어처구니없게도 일몰 보지 못해 아쉽단 생각을 했다.


병원 접수 담당자의 요청으로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바지를 내렸다.

상처 부위에는 손가락 하나 정도로 살이 벌어져 있었다.

접수증 상단에 "Dog bite"라고 크게 적혔다.

병원은 넓고 한산했다.

천장에는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돌고 있었고 실내는 서늘했다.

인도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진찰도구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진찰받는 이들, 대기자들, 의료 업무 보는 이들의 대화, 누군가의 발소리가 고요함 위에 잔잔히 쌓였다.

작은 백색 소음을 들으며 진료대 위에 누워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진정되지 않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심장 박동이 가장 큰 소리 같았다.

키가 크고 표정 없는 남자가 다가왔다.

애써 미소 지으려 노력하는 내게 의사는 웃을 때가 아니라고 했고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상처부위를 소독하고 어떤 의료적인 처치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이름 모를 주사를 놔주고서 밖에 나가면 물을 사서 비누로 상처부위를 씻으라고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안내에 따라 약을 두 개 받았고 내일 한번 더 병원에 오라는 말을 들었다.

반드시 라고 강조했다.

개가 물었던 상처 부위는 일절 조치받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병원 앞을 서성이다가 이내 릭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었다.


숙소 직원이 나를 반겨주며 오늘은 어땠는지를 물었고 개에 물려서 병원에 다녀왔단 말을 했다.

그는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상처부위를 씻기 위해 곧장 옷을 벗었다.

몸 전체가 오염된 것처럼 꼼꼼한 샤워를 오랫동안 했다.

좋은 향이 기분을 풀어주길 바라며 아껴두던 샴푸를 사용했다.

상황까지 풀어주길 바랐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물기를 닦고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가지고 다니던 연고를 상처에 발랐다.

밴드를 붙이고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숙소는 조용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했고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의사의 말과 맞은 주사에 대해 알게 됐다.

'상처부위를 씻으라던 말이 괜히 한 말은 아니었던가' 하다가 '잘 씻었던가?' 한다.

벗어뒀던 옷 역시 세균에 감염된 것으로 여기며 전체를 빨래하고 한 번 더 상처 부위를 씻어냈다.

쓰린지도 아픈지도 모르고 문지르다 거울을 봤다.

삶이란 이제 여기까지라고 하면 당장에 끝나는 것이었다.

오만했다.

끝을 염두한 적 없는 일상과 시대의 찬란함에 흔들렸던 것도 모두 오만이었다.

삶은 예고 없이 유한했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광주로 이사 갈 때까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순천 조곡동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자연히 내게 가족의 인식은 외조부모 두 분과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 다섯이었다.

조곡동에서 또래 중 천방지축은 나였고 앞세대엔 아버지 김철수 씨가 있었다.

티끌 없이 뛰어노는 중에도 나는 일찍이 부끄러움을 알았다.

또래에 비해 이른 나이였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 기인한 것이었고 내 마음으로부터 시작했다.

타인의 시선이 실제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이제와 생각해 보면 살면서 대부분의 부끄러움은 누군가 나를 부끄럽게 했기 때문보다 내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수많은 감정들 중 어찌 그러한 것을 일찍 알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눈을 감았다 뜨는 것처럼 어느 순간 그렇게 됐다.

조금 더 멋모른 채 살았어도 되는 나이부터.




한 끼의 여윳돈을 가지고 식당이 있는 건물 계단 위로 올라갔을 땐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인사를 건네자 합석을 제안받았다.

무작정 한식을 파는 식당을 찾아 나섰을 땐 된장찌개나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던 것 같은데 한국인들이 그리웠던 것 같기도 하다.

앉아있는 동안 주문된 치킨과 주류는 내 기대나 주머니 사정과 달랐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대가라 여겨야 했다.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었고 그런 수다와 온기 틈에 있어야 했다.

늦은 저녁 숙소로 돌아오기까지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는데 저마다 여행이 달라서 흥미로웠다.

몇몇이 바라나시가 가장 좋았다고 했고, 몇몇은 이제 바라나시로 갈 거라고 했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바라나시를 상상했다.

그리고 많은 이가 한인민박의 술자리나 동행, 맛집이나 투어 등을 이야기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은 내 여행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헛헛했다.


접수증 상단에 쓰인 "Dog bite"를 보며 미지와 다름없는 내 미래를 잠시 떠올리다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따금 미래를 가늠해 보려던 고등학생 어느 날 밤,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하던 때,

졸업이 다가오는 사 학년과 같은 순간들에도 미지와 같은 미래를 애써 더듬으려 했고 그때마다 울렁이는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때는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아득하게 먼 시간이 있었고, 지금은 내가 가진 어떤 것과 무관하게 삶이 모호하다. 매우 짧게 유한할지도 모른다.

대단한 인생의 과정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삶이 유한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위험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도 있었다.

자이푸르의 요새에서 석양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던 밤에도 있었다.

처음 한국을 떠나며 가지던 경계심이 많은 국가의 경계를 넘는 동안 풀어졌음을 이제야 인지하고 아쉬워한다.

골목 반대편에서 개가 걸어오고 있었고 큰 경계심 없이 곁을 지나쳤다.

경계심 없는 태도가 오히려 그를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일이 벌어진 후의 부질없는 후회에 헛웃음이 나왔으나 그마저도 잘 웃어지지 않았다.

경직된 얼굴 근육이 느껴졌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다.

처음으로 겪는 상실이었다.

눈물은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진했고 이후론 떠올릴 때 그득히 흘렀다.

처음 들어선 장례식장에 나처럼 어린 사람은 친척들뿐이었고 모두 어느 정도 연배의 어른들이었는데 두 분이 연세와 지병도 있으셨는데 같은 날 새벽에 돌아가셨다며 호상이라 했다.

호상이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저들만의 서툰 위로이자 스스로의 슬픔을 달래는 서툰 언어로 받아들였다.

예고 없이 찾아와 이제 앞으로는 볼 수 없고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크나큰 상실감이었다.

처음으로 며칠간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몹시 어린아이였을 때 죽음과 같은 미지의 미래를 떠올릴 때면 무서웠다.

거대하고 막막한 무언가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하고 나는 무로써 세상에 혼자가 된다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그런 공포가 찾아올 때면 불을 켜거나 엄마를 찾았고 그럼 그 생각에서 벗어나며 따뜻한 현실에 머물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성인이 되면서는 몹시 드문 일이 됐다.




조드푸르에서 아그라로 넘어가는 야간 기차를 탔다.

같은 칸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아이들과 UNO를 즐기다가 이내 자리에 누워 잠을 취했다.

혼란스럽던 며칠 동안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내려둔 탓인지 불편하거나 거북한 것은 전혀 없었다.

많은 이들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구두를 닦겠냐고 묻던 아이, 신발을 신지 않은 사람들, 보온통을 들고 다니는 사내, 허공에 시선을 던지는 이들, 릭샤 기사들, 방에서 물건을 훔치려던 아이, 언덕 위의 세 청년, 옥상 위의 아이들, 도로 위 상인들과 잠을 자는 이들, 세 여인과 커플, 사진사, 숙소의 인연들, 주방을 보조하던 소년, 낙타를 끄는 소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지난 이틀간 한번 더 병원을 방문했다.

처방과 관련된 종이를 받고, 맞아야 하는 주사에 대한 설명을 연거푸 들었다.

기간을 두고 몇 차례 백신을 맞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이라고 했다.

여전히 혼란스러울 때 카메라를 챙겨서 전에 가지 못했던 선셋 포인트로 향했다.

개가 보이면 미리 위협해 쫓거나 슬그머니 돌을 집어 들었다.

이전엔 하지 않던 행위. 공포감이 마음속에 자리했나 보다.

생각해 뒀던 장소로 가는 길을 찾았지만 개 두 마리가 배회하고 있어서 쉽사리 올라가지 못했다.

세 번을 주저하다가 돌을 던져 쫓아낼 생각으로 가보니 어느새 개들이 사라져 있었다.

긴장하면서 올라간 암석 지대에는 조드푸르가 펼쳐져있었다.

자리에서 빙 돌며 사방을 보는 동안 감동이 있었고 잠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게 행복이었다.

요새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비교되지 않았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후회했겠다.

여운을 느끼는 동안 한식집에서 만났던 여행자들 중 세 명이 이곳을 찾았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주고받았다.

석양의 시간엔 가만히 앉아서 해지는 쪽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석양이 하늘과 도시를 물들이는 동안 보고 싶은 이들을 떠올렸다.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그곳을 내려왔다.

별다른 것을 하지 않고 숙소 옥상에 앉아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옥상에서 빨래를 너는 엄마들과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들과 흐린 적 없던 날씨와 밤의 별들과 아름다운 석양을 봤고, 어렴풋하게 계속 들여오는 릭샤나 오토바이의 경적을 들었고, 때마다 불어오는 살랑살랑 바람을 느꼈다.


아그라로 간다.




<두 분께>

언젠가 엄마와 아빠가 다툴 때 할머니를 부르기 위해 경로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네 어르신들 틈에서 할머니를 불러낼 때 사실을 말하지 않고 엄마가 찾는다며 둘러댄 건 제가 배려나 현명함이나 성숙함을 갖춘 탓이 아니라 일찍이 부끄러움을 알았던 탓입니다.

할머니는 제게 영민하다며 두루 칭찬하고 명절에 모인 친지들에게 그것을 자랑하셨지만 저는 그저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성숙, 조숙, 의젓과 같은 단어를 붙였습니다.

철든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과 관련 있었나 봅니다.

아무튼 어린 날의 부끄러움은 타인의 시선을 인지하고 의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핀잔을 들을 때도 거리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핀잔 듣는 것을 심히 부끄럽게 여겼고 그로 인해 다툴 때가 많았습니다.

부끄럽기 때문에 쑥스러운 것으로 연관되는 상황도 많았습니다.

창피함도 그와 맥락이 같았습니다.


어쩌면 제 삶에서 이것이 때로 저를 올바르게 하고 강인함과 연약함의 원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기인했던 감정은 때로 제가 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됐고 어느 날부터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었습니다.

입 밖으로 말과 생각을 꺼내지 않고 행동하지 않아도 온전히 나를 아는 것은 나였고, 그래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지나는 일상에서 양심과 도덕성, 가치관을 포함한 어떤 기준에서 과연 떳떳한가를 물을 때가 많았습니다.

특정한 행위뿐만 아니라 산다는 것, 하루와 일주일을 보낸 다는 것,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두고 스스로에게 떳떳한지를 묻습니다.


이것은 매우 엄격한 잣대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고 삶은 관계 속을 살아야 하기에 각자의 신념과 행동양식을 지키며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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