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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안톤 May 04. 2020

준비병

이제 그만 준비하고 시작 좀 하자.....

나는 몇 가지 고질병이 있다.

작심삼일병, 맛있으면 0 칼로리병,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병 등등..

그중 요즘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준비병'이다.

무엇인가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본 작업에 앞서 준비하는데 너무 많은 자원을 낭비하는 일종의 습관이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외출 후 간단히 씻고 일찌감치 PC를 켰다. 브런치에 로그인을 하고 '글쓰기'를 클릭했다. 보통은 글을 써 나가면 되겠지만 그 사이에 나는 다음과 같은 준비작업을 했다.


- 의자와 발 받침대의 높이를 맞췄다.

- 글 쓰다가 목이 마를 것을 염려해 물을 한병 꺼냈다.

- 냉장고에 생수가 몇 병 남지 않은 것 같아 온라인 마켓에서 주문을 하고 결제를 했다.

- 왠지 차도 마시고 싶어 질 것 같아서 홍차 티백을 꺼내 우려내고 보온 텀블러에 담아 두었다.

- 중간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지면 흐름이 깨질 것 같으니 화장실을 다녀왔다.

- 글을 쓰다 보면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소등을 하고 책상의 스탠드를 켰다.

- 가볍게 메모를 할 수 도 있으니 연필과 메모지를 꺼냈다.

- 뭉툭한 연필이 거슬렸다. 연필을 굳이 칼로 깎고, 지우개도 꺼냈다.

- 연필은 자주 깎아야 하니 만년필도 꺼냈다.

- 책상이 어수선해 보였다. 시야에 거슬리는 물건을 정리하고 먼지도 털어냈다.

- 책상 위의 먼지가 방안에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 청소기를 돌렸다.


대부분 이런 식이 었다. 처음에는 그저 내가 산만한 성격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 했으나 가끔 그 정도를 벗어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에는 언제 어디서나 '땡길 때' 글을 쓰기 위해서 휴대용 블루투스 키보드와 블루투스 마우스, 태블릿 PC, 만년필, 만년필이 잘 번지지 않으면서 가볍고 작은 수첩, 북 파우치, 태블릿 파우치, 보조 배터리 등을 준비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집에서 노트북을 켜고 일반 키보드로 글을 쓴다. 이렇듯 무엇인가 작업을 하기 전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염려하며 준비하려고 하는 습관은 본 작업은 제쳐 둔 채 '딴짓'으로 이어졌다.


축구선수로 합숙소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준비' 시간에 사치를 부릴만한 여유가 없었다. 새벽 5시 반 기상을 시작으로 저녁 9시에 시작하는 야간 훈련까지 하루 종일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창 잠이 많던 시절, 새벽훈련은 우리 팀 모두에게 지옥과도 같은 그것이었다. 취침 전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무시무시한 기도를 하기도 했다. 1분이라도 더 자고 싶었던 우리의 욕망은 어느덧 '준비'시간 단축 경쟁에 시발점이 되었다.

처음엔 그저 유니폼을 미리 입고 자는데 그쳤다. 그러나 누군가 축구 스타킹을 신고 자기 시작했고, 뒤이어 정강이 보호대를 차고 자는 사람과 축구화를 신고 발은 신발장 쪽에 둔 채 자는 사람이 나타났다. 취침시간에는 숙소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운동장에서 노숙은 하지 못하였다. 더 이상의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자, 이제는 훈련을 마친 뒤, 유니폼을 입고 몸과 옷에 비누칠을 하며 빨래와 동시에 샤워를 했다.  


그저 잠을 더 자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사실 운동하는 동안에는 어느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때의 나를 다시 떠올리며, 쓸데없는 준비작업에 아까운 시간을 소비하는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땀에 쩔은 축구화와 스타킹을 장시간 착용하면 '무좀'이 생긴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시간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적당한' 준비 습관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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