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무 좋음~
내가 대리로 발령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회사에 오랜만에 신입사원이 입사를 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이사님, 부장님들과 하하호호 아재 개그만 하다가 신입사원을 보니 반갑고 좋았다. 모처럼 회식자리도 가지게 되어 나의 텐션은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신입사원을 중심으로 가벼운 인사와 자기소개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남자 직원들은 군대 얘기로 이어졌다.
어디 근무하셨어요? 아!!! 진짜요? 하하~ 그래도 거긴 편했겠네요~ 저는요~
약속이나 한 듯 남자 직원들의 군대 얘기가 나오자마자 여직원들은 "어제 그 드라마 봤어요?" 라며 자기들만의 안주거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 딱 중간에 앉아 오른쪽 귀는 군대 얘기를, 왼쪽 귀는 드라마 얘기를 들으며 상추쌈에 깻잎 하나, 풋고추와 구운 마늘을 각각 올리고 저 바삭바삭 잘 익은 삼겹살을 한 조각 올릴까 두 조각 올릴까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여직원들이 말하는 그 드라마도 봤고, 군대는 다녀오지 않았지만 합숙소에서 단체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심지어 합숙소는 군대 내무반과 똑같은 구조로 생겼다) 어느 쪽 대화에 껴도 상관이 없었다.
한참을 양쪽 귀로 듣고 있던 중 여직원들의 드라마 리뷰가 먼저 끝이 났는데, 여직원들은 군대 얘기 그만하고 다 같이 놀자고 말을 했다. 그 순간 평소 분위기 메이커를 자청하던 남자 대리가 소주잔을 급하게 털어마신 뒤 '당신들 배꼽은 이제 내 거라고!!' 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 그럼 제가 웃긴 얘기 하나 할게요!! 저 군대에서 축구할 때 골키퍼 보던 후임 녀석이 있었는데 글쎄 그놈이 있잖아요 하하하하!!
난 그다음 스토리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뭐, 어떻게 된 건데? 그 후임 녀석이 뭘 했는데 응? 응? 나도 축구할 때 배꼽 빠지는 에피소드가 꽤 있는데~ 후훗.. 저 녀석 얘기하고 나면 나도 해야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사님께서 군대는 이제 얘기 그만하자고 하시며 요즘 무슨 영화가 제일 인기 있냐고 화제를 돌리셨다.
결국 죽어가는 프로그램도 손만 대면 살아났다는 이사님의 무용담을 끝으로 1차 회식은 마무리되었다. 집에 귀가할 직원들을 보내고 2차로 맥주를 한잔 더 하기로 한 사람들은 '호프&치킨'이 쓰여있는 바로 옆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오래된 낡은 느낌의 가게였다. 왠지 기본 안주는 뻥튀기를 줄 것만 같았고, 테이블에는 뽑아 쓰는 티슈 대신 하얀 두루마리 휴지가, 화장실 갈 때는 효자손에 달린 열쇠를 들고 가야만 할 것 같은... 그런 클래식한 호프집이었다. 다행히 효자손 열쇠는 아니지만 1.2리터 페트병에 열쇠가 달려있어서 화장실을 갈 때마다 품에 꼬옥 안고 가야만 했다.
생맥주와 마른안주를 대충 시켜놓고 나니 자연스레 1차에서 하지 못했던 '골키퍼 보던 군대 후임'얘기가 무엇인지 다들 궁금해했다. 얘기 중 절반 이상은 본인이 그 당시를 회상하며 꺽꺽 숨넘어가는 웃음소리였다. 대충 요약해보면 트레이닝복 바지의 고무줄이 많이 늘어나서 흘러내릴 지경이었는데 공중볼을 점프하여 캐치하는 순간, 고무줄이 끊어지며 바지가 내려갔다는 것이다. 잔뜩 기대했던 것에 비해 싱거운 에피소드였으며, 이미 우리가 웃어야 할 몫까지 본인이 다 웃어버리는 바람에 김이 샐 수밖에 없었다. 1차에서 다른 직원들이 듣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하하 맥주 김 빠지겠다! 한잔할까? 하며 생맥주 한잔으로 분위기를 일단락했다.
축구 얘기를 시작하자니 자연스레 나에게 관심이 쏟아졌다. 선수 출신이기도 했고, 코치도 했으니 늘 남자 직원들은 나에게 축구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
Q. 무회전 슈팅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A. 회전을 주지 않으면 됩니다.
Q. 잔디에서는 오버헤드킥 하고 떨어질 때 안 아프지?
A. 아파요. 근데 헛발질하면 마음도 아파요.
Q. 여자선수들도 기합 받고 선배한테 맞기도 해?
A. 삐져서 괴롭히는 선배보다 깔끔하게 때리고 끝내는 선배가 더 인기 많았어요.
Q. 아무리 그래도 남자들 군 생활보다는 편했겠지?
A. 군대는 그래도 제대를 하잖아요.. 7~8년 동안 같은 선임과 군 생활하신다고 보면 됩니다.
Q. 기억에 남는 골이 있어?
A. 대학부 결승전에서 넣은 골이 기억나네요. 잊을 수가 없어요. 자책골이라...
Q. 국가대표는 해봤어?
A. 제 키로 국가대표되려면 체조해야 돼요...
Q. 여자축구는 남자보다 축구공이 작지?
A. 네??.....
군대와 축구는 나에게 있어 늘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내 주변 대부분의 여직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굳이 성별을 나누어 비교할 의도는 없으며, 단지 경험의 다름에서 오는 보편적인 취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모임에서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남녀노소 즐겁게 대화하길 원하지만 나 역시 드라마, 쇼핑, 연예 또는 연애보다는 스포츠, 영화, 군대, 게임, 만화 등에 깊은 흥미를 느낀다.
중요한 것은 대화의 주제보다 상대의 이야기에 들으려고 하는 자세일 것이다. 내가 관심 없는 주제를 얘기한다고 해서 지루해하거나 말을 잘라버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대화는 건성으로 넘기고 내 이야기만 하려고 발악했었다.
아는 분이 입버릇처럼 자주 하시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눈도 두 개고 귀도 두 개나 있으니까 잘 보고 잘 들어야 돼.
입은 밥 먹고 술 마실 때만 쓰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