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의 난(亂)
합숙소 생활은 하루하루 고되고 힘들었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동기들과도 제법 우정이 쌓였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선배들의 비위도 그럭저럭 맞춰갔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2학년이 된 일반학생들은 1층에 있던 교실에서 3층으로 배정되었다. (2층에는 교무실과 교장실 등이 있다)
1년 동안 겨우 반 친구들의 얼굴을 익혔는데 새로 들어간 2학년 교실에는 또 모르는 얼굴들이 잔뜩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축구부가 본인의 반에 배정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도 축구부가 반 평균을 깎아먹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만큼 마음씨도 못된 선생님이었다.
합숙소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직 국민학생 티를 벗지 못한 1학년 신입생들이 들어온 것이다. 1학년은 전부 8명이었다.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 축구팀으로 진학한 3학년 선배들의 공백은 느낄 틈이 없었다.
2학년 선배들은 3학년이 되자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3학년 선배들이 있을 때는 중간에서 1학년들도 챙겨주고 잘 어울리더니 3학년이 되자마자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1학년 신입생들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선배들이 어찌하건 말건 나를 포함한 동기들은 신입생이 들어온 것에 들떠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왔다.
나도 아직 똥강아지인데 눈도 못 뜬 강아지들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모양새였다.
괜스레 말도 걸고, 몰래 과자도 쥐어주며 후배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후배들은 제법 똘똘했고, 소신 있는 아이들이었다.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다른 인종으로 느껴질 만큼 달랐다.
선배들의 강압적인 태도에 복종하지도 않았고, 의견이 다르다면 정확하게 표현했다.
3학년 선배의 축구화를 닦아놓으라는 말에 자기 축구화는 자기가 닦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던 신입생의 한마디로 선배들은 화를 참지 못해 숙소 문을 발로 차고 나가버렸으며, 애꿎은 2학년들만 머리를 박아야 했다.
후배 교육을 똑바로 시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머리를 박으면서 생각했다.
'안 그래도 잘 안 열리는 문이 더 안 열리겠구나...'
1학년 신입생들은 부모님들도 남달랐다.
3학년 학부형은 학부형 모임에서도 선배였다.
매달 열리는 학부형 회의에서 3학년의 부모님들은
1, 2학년 부모님들에게 늘 선배처럼 굴었다.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셔서 거의 참석하시지 못했지만, 매달 오셨던 순애 어머니는 3학년 선배의 어머니에게 커피도 타 주고 머리까지 굽혀가며 인사를 하곤 했다.
순애 어머니가 훨씬 나이가 많으셨음에도 그것이 당연했다.
1학년 학부형들이 처음 회의에 참석하던 날, 숙소에서는 고성이 오고 갔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 하지 않았던가.
파이팅 넘치는 대화가 오고 가는 명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아 동기들과 숙소 창문을 기웃거렸다.
그날 저녁 무엇 때문인지 화가 잔뜩 난 3학년 선배들은 1, 2학년을 모아놓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기합을 줬다.
아무래도 1학년 부모님들이 이긴 듯했다.
015B의 ‘신인류의 사랑’에 나오는 ‘신인류’가 ‘신’씨 성을 가진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
새로운 인류라는 뜻을 알고 나서 보니 그것은 바로 1학년 신입생이었다.
그간 행해진 잘못된 관습과 폐해를 지적하며 하나씩 바로잡기를 원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애초에 이런 불합리하고 폐쇄적인 숙소 생활이 싫었는데 이 참에 싹 갈아엎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2학년들은 3학년처럼 권위적인 성격도 없었고, 그냥 언니 동생 하며 지내는 합숙소를 꿈꿔왔으니 이번에야 말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축구부 역사에 길이 남을 혁명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들의 권위에 스트레스를 참지 못한 3학년 선배들이 대거 이탈을 한 것이다.
이탈이라 해도 집으로 가는 게 전부였지만 당시에는 큰 사건이었다.
결국 감독님은 1, 2학년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언니들 말 좀 잘 듣고, 개기지 말라고. 그리고 3학년 언니들 고등학교 가면 그 언니들 밑에서 또 고생해야 되는데 1년 동안만이라도 편하게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것이었다.
감독님이 말씀하신 ‘그 언니들’은 졸업한 3학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역에 여자축구부가 중학교 1개, 고등학교 1개밖에 없으니 그 유별난 언니들을 또 만나야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감독님의 설득으로 숙소에 돌아온 언니들과 모여 앉아 차갑게 식은 통닭을 먹으며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
그 유별난 언니들에 대해,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던 1학년들은 언니들이 불쌍하다며 앞으로 말 잘 듣겠다고 약속을 했다.
애들은 애들인가 보다. 잔뜩 기대를 했던 나는 김이 빠져버렸다.
그 와중에 닭다리와 날개를 모두 가져가 버린 3학년을 보며 나는 더 실망했다. 퍽퍽한 가슴살을 싫어하는데 다리 하나쯤은 동생들에게 줘도 될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걱정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그 언니들’과 ‘이 사람들’을 또 만나야 한다.
다음날 아침, 사고뭉치 순애가 3학년 선배의 축구화에 물김치를 쏟는 바람에 나와 동기들은 또 머리를 박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