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도 루팡, 밤길 조심하거라...
유난히 힘든 프로젝트가 있었다.
배정된 프로젝트 구성원도 엉망, 담당자도 엉망, 분위기도 엉망인 그야말로 최악의 프로젝트였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IT업계에서는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북한산 등산객보다 많다.
꾸역꾸역 기계처럼 프로그램을 만드는 직원들 사이에 ‘용병’이 있었다.
이 용병이라 함은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로 단가가 높지만 기술력이 뛰어나고(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단기간 채용이 용이해 프로젝트 인력이 부족할 때 주로 고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군대에서 말하는 용병에서 따온 말이다. 프로젝트 또한 전쟁이니까)
용병은 2개월간 계약을 하는 조건으로 고액의 보수를 받고, 핵심 모듈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러나 투입한 첫 주에는 새로운 개발환경에 적응한다는 이유로 놀더니 그다음 주도 놀고, 한 달을 빈둥거리며 놀았다.놀았다는 표현은 프로그램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다.
실력과 자질이 몹시 의심스러워 관리자에게 여러 차례 보고했으나 ‘비싼 용병’이니 믿어보자는 말만 돌아왔다.
그 후로 옆에서 흘겨보던 나를 의식했는지 본인도 양심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뚝딱거리며 일을 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계약 종료일이 되었고, 용병이 만든 프로그램을 급하게 적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내 담당 파트가 아니었기에 직접적인 관여를 할 입장은 아니었으나 그간 행적을 보면 여간 미심쩍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매일 수다 떨고, 간식 먹고, 담배 피우고, 졸다가 칼퇴근하는 모습만 봤는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하니 더욱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테스트에 앞서 프로그램의 소스코드를 열어 보기로 했다.
보통 개발자에게 소스코드 좀 까 보자는 말은 골목식당에서 백종원 대표가 식당 주인에게 주방 냉장고를 열어보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 초보 개발자가 아닌 이상,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행위다.
아, 왜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을까.
프로그램 소스는 2개월간 놀았던 흔적이 역력했다. 테스트는 해볼 필요도 없었다. 그동안 한여름 배짱이처럼 신나게 놀고 남들보다 몇 배의 월급을 받으며, 참붕어빵만 열심히 먹던 그 용병은 그렇게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도망간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괴도 루팡 같은 그놈이 아니라 평소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무능한 관리자를 탓해야지.
감독님은 이따금 자율 훈련을 빙자한 ‘땀 검사’를 하시곤 했다.
각자 한시간 동안 알아서 운동을 하고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검사를 받아 땀이 적게 난 선수는 운동장을 몇 바퀴 돌게 하거나 청소를 시키는 등의 소소한 벌칙을 주셨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트레이닝복을 겹겹이 입던가, 통풍이 1도 안 되는 땀복을 입고 줄넘기, 러닝, 계단 뛰기 등 땀이 날 수 있는 모든 훈련을 했다.
앞서 땀이 적게 난 선수는 벌칙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땀을 많이 흘린 선수에게는 돌아가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다음날 새벽훈련 열외였다. 내가 로또보다 값지다고 부르짖던 그 새벽훈련 열외가 보상인 것이다.
이 땀 검사의 관건은 땀을 흘리는 것보다 검사를 받기 직전까지 땀이 식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동기중 한 명이 일주일 내내 1등을 차지했다.
한참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다가 훈련시간이 종료될 때쯤 헐레벌떡 뛰어오는데 신발도 젖을 만큼 땀에 젖어있었다.
한여름 오후 훈련에도 저렇게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땀 검사로 야간훈련이 진행되었다. 나와 동기 몇 명은 매번 1등을 차지하는 그 녀석의 뒤를 밟기로 했다.
감독님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그 녀석은 어딘가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따라가 보니 학교 근처 청소년 오락실이었다. 오락실에 도착한 그 녀석은 익숙한 듯 동전을 교환하고 당시 ‘펌프’라고 불리던 기계 위로 올라서서 ‘노바소닉’의 ‘또 다른 진심’을 선택했다.
은갈치색 땀복을 입고 머리엔 비닐봉지를 쓴 채, 남들 시선은 아랑곳없이 열심히 발을 구르며 펌프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실력은 또 쓸데없이 좋아서 ‘펌프의 요정’ 같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치사하고 좋은 방법을 혼자만 알다니!
동기들과 나는 증거를 포착한 후 숙소로 달려와 주장 언니에게 사실을 말했다.
축구 부원중에 가장 새벽잠이 많은 주장 언니는 그날 취침 전 그 녀석을 불러놓고 꾸중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넌 앞으로 일주일간 학교 밖 외출금지고, 땀 검사 때 그 어떤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러나 며칠 뒤 땀 검사에서 그 녀석은 또 1등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식당에서 김장용 비닐을 몰래 가져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1시간 동안 뒤집어쓰고 있었다고 한다.
월급과 참붕어빵만 축내던 괴도 루팡 용병은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았다.
모두가 땀 흘려 훈련하고 있을 때, 오락실에서 펌프를 하고 땀 검사를 받은 펌프 요정도 치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반칙이고, 비 신사적인 행동이다.
페어플레이는 꼭 동등한 조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팀마다 전력의 차이가 있고, 개인의 능력과 한계가 모두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정정당당하게 겨뤄보자는 것이 바로 페어플레이다.
승패의 결과를 떠나서 자신의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고 상대를 존중하며, 패배하더라도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자는 의미도 담고 있다.
용병과 펌프의 요정의 행동은 아무리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선이라 할수없다. 우리가 흔히 ‘양심’이라고 말하는 도덕적인 가치관과 마음을 져버리는 행동인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페어플레이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
용병은 또 다른 프로젝트에 들어갔고, 펌프의 요정은 아우디를 끌고 다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