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의 유효기간
휴대폰에 깔아 둔 D-DAY어플에는 나의 여러 가지 초보 이력이 저장되어 있다.
태어난 날, 첫 입사, 첫 독립일 그리고 팀장 발령일도 기록되어있다.
어렵게 어렵게 팀장까지 되었고 어느 정도 업무에 적응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스스로를 초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초보 팀장인 걸까? 초보라는 말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이며, 도대체 누가 어떻게 나의 초보 딱지를 떼준단 말인가?
베테랑은 다르겠지?
옆동네 부서에는 6년 차 베테랑 팀장님이 있다. 처음 팀장 발령을 받은 후 가장 먼저 그분께 업무를 배웠다. 어느 직위나 그렇지만 팀장이 되었다고 해도 누군가 교육을 해주지는 않나 보다. 결국 물어물어 베테랑 팀장님을 찾아갔다.
팀장이 해야 하는 일은 생각했던것과 달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별, 월별, 분기별로 조직과 팀원에 대해 보고서와 평가서를 제출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 소소한 결제업무가 몇 가지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본인만의 팀원 관리 노하우도 있지 않을까, 명색이 팀장이니 말이다.
베테랑 팀장의 노하우는 대충 이러했다. ‘너무 잘해주면 기어오른다’, ‘퇴사하겠다는 사람은 무조건 잡아라. 안 그러면 윗선에서 잔소리한다’
예쁘게 포장한 개소리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이 사람도 팀원을 그저 쓰다 버리는 자원으로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베테랑이란 칭호는 윗분들이 지어줬겠구나 싶었다.
팀장도 초보일 때는 실수투성이다
팀장 발령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고과 평가 기간이 되었다. 그간 평가를 받는 입장에서(물론 팀장도 평가를 받는다)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것에 솔직히 조금 상기되어있었다. 일주일 동안 팀원들에 대해 평가를 작성하고 고과점수를 산정했다. 결과서를 제출하고 하루쯤 지나자 사업부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김 팀장! 인사평가를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여기팀은 무슨 잡스(스티븐 잡스)만 모았어? 인사 평가 등급이 죄다 S(최고등급)야?"
"다들 너무 일을 잘하는데요."
“....... 다시 고쳐서 보내줘. 그리고 김 팀장 본인 평가서에 의견은 내가 쓰는 건데 왜 본인이 썼어?”
“아... 저도 평가받나요?”
“나도 평가받아..... 수정해서 다시 메일로 보내...”
그새 얼마나 지났다고 기억도 희미하지만 매일매일 긴장의 연속이었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실수도 참 많았다. 왜 그동안 나의 수많은 팀장님들에게선 보이지 않았던 어설픔과 실수가 나에게만 있는 걸까. 나는 팀장 자격이 없는 걸까 하고 자괴감에 빠진 적이 많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자연스레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대부분의 팀장과 관리자들이 이런 고민을 해봤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대표이사에게 찾아가 팀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하소연도 했다고 한다.
SNS에 올라온 사진에는 누구나 다 행복해 보이듯 겉으로 봤을땐 "팀장님~"소리를 듣고 권위가 있어 보이지만 팀장과 관리자들도 초보때는 다 어설프고 실수투성이었나 보다.
팀원에게 잘 보여야 할까요?
결론만 놓고 본다면 잘 보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팀원이 없는 팀장은 없으니 나를 팀장으로 있게 해 주는 것도 팀장에서 쫓아낼 수 있는 것도 팀원이라고 생각을 한다.
단, 무엇이든 극단적으로 치우쳤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여러 커뮤니티와 브런치에 올라오는 팀장에 관한 안 좋은 이미지를 없애고 ‘좋은 팀장’이 되고 싶은 욕심에 팀원의 눈치를 살피다 보면 어느새 나는 만만한 팀장이 돼버린다.
팀원에게 잘 보인다는 것은 나의 행동을 돌아봄으로써 시작된다. 수많은 팀장들이 욕먹는 이유도 주변 사람과 팀원에게 안하무인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팀원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평가하고 배운다고 생각을 한다면, 책상에 앉아 드라마를 보며 코털을 뽑는 만행은 저지르기 힘들 것이다.
오늘도 초보 팀장은 이렇게 배웁니다
"김 팀장! 아무개 씨가 이직한다는데 알고 있었어? 오늘 좀 만나서 잘 설득해봐"
누군가 또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퇴사하려나보다. 난 퇴사를 원하는 직원을 특별히 말리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아무 계획 없이 쉬고 싶다는 직원에게는 안식년을 먼저 사용해보라고 권유하거나 연봉을 많이 주는 회사로 간다는 직원에게는 왜 그 회사가 굳. 이. 너. 에. 게 돈을 많이 주려할까?라고 작은 의심을 심어준다. 이직을 포기하게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많이 주는 회사는 1) 일을 많이 시키거나, 2) 어려운 일을 하거나, 3) 내가 엄청 잘나서 라는 게 내 나름의 결론이다. 그러한 기준으로 봤을 때 본인이 1,2,3번 중 어디에 속하는지 판단해보고 잘 결정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물론 나도 데려가 주면 좋고.
팀장도 임원도 대표이사도 결국 날 때부터 관리자들은 아니다. 초보 또는 신입이라는 단계를 거쳐 경력자가 되고 베테랑이 된다.
위기상황이 닥치면 초보는 당황한다. 당황을 넘어 절망도 한다. 머리가 굵은 초보일수록 자존심도 더 상하고 자존감도 떨어진다.
그러나 초보 딱지는 언젠가 떼어진다. 내가 떼는 것이 아니다. 넘어지고 부딪치며 생긴 상처가 보기 흉하게 곪게 될지, 영광의 상처가 될지는 내가 초보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따라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아물고 딱지가 내려앉는 동안 그 안에서 불그스름한 새살이 올라오면 딱지는 자연스레 떼어진다.
나의 초보 팀장 딱지도 그렇게 보드라운 새살이 나며 떼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