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싹쓸이

블루아이(blue eye)

by Dinnerout

예정보다 한 달을 더 머물러, 꼬박 세 달의 짧고 뜨거운 꿈을 꾸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남은 여정은 대학원 논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 밖에선 글을, 물속에선 기록을 다듬는 일상이 이어졌다.


얼마 전 전국대회에선 예상했듯이 국가대표 김선우, 김민우가 나란히 한국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이준호 선수도 무릎부상에서 말끔히 회복되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형님의 마법 같은 트레이닝 덕분입니다."


그들의 문자를 읽으며 미소와 함께 뿌듯했다.

나는 안다. 방법을 알려줘도 결국 해내는 건 본인이라는 걸. 노력 위에 쌓인 결과만이 진짜 보석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내 기록은 멈췄다. 50m 자유형 23.93

개인훈련도, 팀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줄지도, 늘지도 않은 기록이 미묘했다.

물론 간헐적으로 나가는 마스터즈 대회에서 여전히 메달을 쓸어 담고 있었다.


한 수영 커뮤니티에서는 내가 나간 수영대회 이야기가 나왔는데 '선수출신이 와서 애들 기 다 죽인다.'라는 기분 좋은? 오해까지 받았다.


썬버닝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중에 30대 초반으로 빨간 꽃잎을 물고 표범이 그려져 있는 강렬한 수영복을 입고 온 그는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했습니다.'라고 자신감 있게 자기소개를 마쳤다.


모임특성상 여미새, 남미새, 전 현직 수영선생님 그리고 초, 중, 고 엘리트출신 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여긴 다른 수영모임보다 수영에 진심이고, 운동량이 많아 만만치 않는 곳이다.

그 때문에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몇 번 나오고는 곧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곳이었다.


상비군은 더 나아가

"제가 선우랑 같이 훈련도 했어요."


옆에 있던 지윤이가 내 눈을 슬쩍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는 형식적으로 '대단합니다' 하고 넘겼다.


워밍업을 보니 확실히 잘한다. 부드럽고, 캐치도 좋고 상비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본 훈련에 들어가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점점 롤링은 과하고 킥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인터벌이 이제 막 3개 가 끝날을 무렵 호흡이 되지 않아 숨소리가 수영장에 울려 퍼졌다.

2번째로 서서 하더니 점점 순번이 뒤로 밀려났다.


"요즘 운동을 좀 쉬었습니다. 몸 만들면 금방 올라옵니다."

자신감은 여전했다.


요 며칠은 은성샘이 바빠서 나랑 택진이 형이 번갈아가며 훈련표를 짰고 리딩을 진행했다.

은성샘 외에 아무도 선수 출신이 아니라는 걸 알자 말 수 가 많아졌다.


"택진형님, 접영 할 때 엉덩이 더 올리셔야 돼요. 파도 타듯이"


"정호야 엘보 더 올려"


자칭 상비군이 나에게 조언을 하는 도중에 택진이 형이 끼어들어 장난스레 말했다.

"둘이 50m 대결 한번 해봐."


그의 눈이 반짝였다.


"정호 너 뭐 잘하냐?"


"저 그냥 자유형 하죠."

"빨라?"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에이 선출도 아닌데 형님한테 안 되죠.”


뒤에서 희수가 지윤이한테 속삭였다.

“졸라 깝치네 정호오빠 몇 초 나오는지도 모르고”


희수가 웃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지는 사람이 초코우유 쏘기해요."


"우리 팀 전체?"


"에이 저 상비군까지 했는데 정호한테 부담되죠."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얼마 전에 아르바이트해서 돈 많이 벌었어요."


다들 웃었다.


"저녁내기 할까요? 요 앞 삼겹살 맛집 있는데."


"저녁? 너 선출 아니지? 진짜? 몇 초 나오는데?"


"저는 23초 정도 나오는 것 같아요. 그냥 수영 잘하는 일반생활체육인이죠."


"무슨 23초야 구라가 너무 센데 크크크."


모여있던 멤버들도 다른 의미로 웃었다.


데크 위로 일렬로 모이고 택진이 형이 손뼉을 쳤다.


"오늘 훈련 마무리는 대시 50m 하겠습니다. 둘이 먼저 대시하고 그다음부터 부저 맞춰서 둘씩 뛴다."


멤버들은 마지막 훈련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들 상비군이 시합이 끝난 뒤 어떤 표정과 어떤 대사를 칠지 궁금해했다.


"진짜 시합이라고 생각하고 뛴다."


'Take your mark'


'삐익!'


발이 스타트대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는 순간. 그 짧은 공중에 있는 시간이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스돌브가 끝나자마자 거침없이 나갔다.

옆레인은 내 정강이 위치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35m 지점에 첫 호흡을 하고 마지막까지 물을 밀어냈다.


터치!


정호 23.95

상비군 25.80


대형 전광판은 없었지만 택진이형의 목소리는 충분히 컸고, 데크 위에서의 함성이 터졌다.


물안경을 벗고 그를 쳐다보자, 무안한 표정과 떨리는 손이 지면 안 됐었다고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상비군은 대학 때 잠깐 예비였고, 선발된 건 아니었어요.”


택진이 형이 웃으면서 끄덕인다.


"많이 쉬었는데도 이 정도 빠르기와 킥힘이 좋아서 리즈시절로 돌아가면 정호는 안 되지."


"근데 정호 재 진짜 선출 아니에요."


"응. 아냐 그냥 미친놈이지 수영에 미친놈 저녁은 됐고, 다음에 초코우유 사서 돌려."


"네…"


그 뒤로 상비군은 간헐적으로만 나오다 결국 다른 모임에 가서 장이 됐다는 소리를 건너 들었다.


운동을 하면서 느낀 건 언제나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있다는 것이다.


수영이든 인생이든 멀리 가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자세로 저항을 흘리며 미끄러지듯 더 멀리 가야 한다.


진천에서 배운 건 수영뿐만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태도 또한 많이 배웠다.



(집)

‘23초가 내 한계인가? 이 정도로 만족해야 되나?

뭐가 문제지?‘


0.01초도 줄지 않은 초가 희한하면서도 내 수영은 이게 한계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팬티만 입고 긴 전신 거울 앞에서 몸을 천천히 훑었다.

삼각근, 광배근, 코어, 대퇴이두근, 햄스트링, 비복근등 블루아이로 본 내 몸은 온통 짙은 파란색이었다.

얼마 전 가족휴가로 훗카이도여행에서 본 청의 호수처럼 파랗다.

근육만 놓고 보면 국대와 같은 '완성형'에 가까웠다.


‘그럼 심폐지구력, 호흡이 문제가?’

50m 할 때마다 호흡이 옛날에는 두 번이었지만, 지금은 한 번으로 줄었다. 그 한 번도 어떻게든 줄이려 했지만, 35m 지점에 와서는 숨을 쉬지 않으면 더이성 갈 수가 없었다.


"무호흡으로 가면 0. 몇 초는 줄 것 같은데"라고 코치와 감독은 말했지만, 호흡을 해야 마지막 15m에 제대로 된 힘이 실렸다.

게다가 일류 장거리 선수들은 주기적으로 호흡을 하면서 가도 22초 대가 나온다. 단순히 한 번의 호흡이 지금의 내 초가 정체 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초를 줄이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하고 연습을 해봤지만 그 방법을 알 길이 없었다.


마침 가까운 일본에서 수영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우리 팀 은 시간 되는 몇몇 멤버들과 함께 '견학'이라고 말하고 '여행'을 가 보기로 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를 봤다고 하지만, 세계의 벽은 하나 더 있을 것 같았다.


언제는 훈련이 끝나고 데크에 쉬고 있는 김선우 선수에게 물어봤었다.


"올림픽 메달권 리스트들을 보면 일단 피지컬이 달라요, 윙스팬, 관절 가동범위, 발목 강성 등"


"이젠 우리도 피지컬로는 안 꿀린다 생각했는데요."


"맞아요. 많이 따라왔지만, 중요한 건 그쪽 선수층 두께가 우리나라와 달리 엄청 두꺼워요, 내부 경쟁도 치열하고 레이스 경험치가 다르죠. 과학적 지원도 다르고, 예를 들어 수중촬영, 바이오 메카닉, 수면, 영양, 멘탈 코치까지 투자 규모가 달라요.


그 옆에서 가만히 듣던 이준승 코치가 덧 붙였다.

"경쟁이 치열하고, 경험치가 다르다는 건 그만큼 어디서 초를 단축할지 아는 거지.

스타트 반응, 브레이크 아웃, 턴, 마지막까지 템포 유지 등 이런 것들."


맞는 말이지만, 납득은 끝까지 되지 않았다.



(일본 도쿄)


여러 의문을 가지고 도쿄 아쿠아 틱스 센터를 방문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외관은 실로 웅장했다.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과 지붕은 오리가미 즉 종이 접기처럼 일본풍을 상징했다고 하는데 건축에 문외한 나로서도 근사했다.

앞 광장에는 각국의 국기가 정갈하게 걸리고 여러 관중들이 질서 정연하게 입장하고 있었다.


관중석으로 들어가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탁 트인 로비와 10 레인 경기풀, 다이빙풀, 워밍업풀등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세계적인 수영장이었다.


천장은 높고 흰색패널로 덮여 있고 조명에 의해 풀 안의 물이 반짝거렸다.


같이 간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는 희수가 감탄하며 말했다.

“일본애들이 건축은 역시 잘해”


ㄷ형채로 만들어진 관중석은 1만 50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관중석 수와 풀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 선수들의 움직임도 선명하게 보인다. 나 또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날은 결승전으로 센터 안은 긴장감과 왠지 모를 찌릿한 전율을 느꼈다.


"men's 50 Freestyle - Final."


국제 수영연맹 공식 음악과 아나운서의 선수들의 소개가 울려 퍼지고 선수들이 스타트 대 뒤에서 대기하며 한 명 한 명 대형 전광판으로 선수소개가 나올 때마다 응원과 함성이 마치 영국프리미엄 축구장 같은 분위기였다.


힘내라 , 고고 유에스에이, 짜요, 간바레!, 파이팅

다양한 응원구호로 자국팀을 관중들이 큰 소리로 응원했다.


출발 신호전에 겉옷을 벗고 선수 모두는 루틴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아쉽게 아무도 결승까지 못 올라왔지만, 사실 내가 보고 싶은 선수는 단거리 최강자 듀라셀선수였다.


키 : 191cm

몸무게 : 91kg

윙스팬 : 193cm

최고기록 : 자유형 20.16, 접영 : 22.35


미국 국적인 그는 재킷을 벗고 몸을 풀기 시작하자 그의 아우라는 역시 다른 선수들과 달랐다.


칼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가늠할 수 없는 코어와 몸통두께, 그리고 태평양 같은 어깨

수영이 아니더라도 무슨 운동을 해도 준비된 이상적인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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