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보라

블루아이(blue eye)

by Dinnerout

'take your mark '


클래식 콘서트 시작 전 보다 더 고요했다.

관중석에서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록 아주 짧은 정적이 경기장을 덮었다.


'띠익!'


'우와 아아아아아!'


출발 신호와 함께 선수들은 엄청난 반응 속도로 스타트대를 박차고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관중들도 질세라 소리를 질렀다.


스타트도 엄청났지만, 선수들은 물속으로 들어가자 마치 어뢰가 지나가는 것처럼 물결이 갈라졌다.

정확히 15m 지점을 마지막으로 수면 위로 올라온 모습이 이륙준비를 마친 전투기 같았다.

엔진에서 불이 붙은 마냥 무서운 템포로 발차기와 스트로크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 깜짝이야, 정호야 뭐 해? 앉아."

택진이 형이 옆에서 팔을 툭 건드린다.


블루아이로 듀라셀 선수를 본 순간 파란 광배근이 서서히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광배근뿐만 아니라, 미세한 진동이 근막을 타고 삼각근, 전거근, 코어, 햄스트링, 대퇴사두근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뭐야, 저 색깔은...'


그동안 파랑이 최종 단계라 믿었다. 근육의 강도와 몸의 균형. 이건 오랜 훈련이 만든 '강력한 안정화'를 뜻하는 색이었다.


그런데 듀라셀의 등은 파랑을 넘어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점화'


근육과 신경계가 완벽히 연동되는 순간


어떠한 것이 개방되면서 출력이 최대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보라였다.


듀라셀은 얼굴 한 번 들지 않고, 몸의 중심라인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머리, 등, 골반, 다리, 발끝까지 한 줄로 미끄러지면서 한 스트로크, 한 킥마다 정확한 힘의 타이밍에 맞춰 물의 거품과 잔상만 남겨두고 앞으로 전진했다.


다른 어떤 선수도 보라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듀라셀은 리듬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마다 불꽃처럼 보라색이 붙었고, 그 보라색은 서서히 사그라들면서 또다시 타오르기를 반복했다.


터치 직전, 마지막 스트로크에서는 전신이 보라색으로 폭발하며 수면이 바닷가처럼 일렁거렸다.


'우와아아아아!'


'20.13'


전광판에 듀라셀의 기록이 뜨자 2002년 월드컵 페널티킥이 골망을 찢는 순간 들렸던 함성처럼 도쿄 아쿠아틱스 센터 안은 크게 요동 쳤다.


세계 최강 단거리 선수다운 퍼포먼스를 눈으로 직접 보니 딴 사람이라기보다 다른 종을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들도 대단했지만, 그들의 경기는 듀라셀 선수와 비교하면 마치 대학생과 중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보라색?…’

핸드폰 메모장에 적었다.


내 블루아이에서 본 보라색을 켜는 방법만 알면 세계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도, 세계최고의 선수로 트레이닝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 뒤로 이어진 다른 종목의 미국팀 결승전을 지켜보았지만, 내가 찾던 '보라색'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같은 대표팀, 같은 코치진에 의해 같은 트레이닝을 받아왔을 텐데, 왜 유독 듀라셀만 도달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영관람이 끝나고 일본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핸드폰에 적어놓은 글자들이 쌓여있었지만, 의문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같은 훈련, 같은 환경 속에서 유독 듀라셀만 다른 차원으로 간다는 것이 단순히 재능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고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


꿈도 꿨다.


듀라셀이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이젠 너도 나처럼 수영을 할 수 있구나."


"비밀을 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네 눈에 비친 내 보라색 몸을 따라 여기까지 온 거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힘들었지?

이제 네 몸을 봐봐. 너도 보라색이야."


"그러네요 저도 이제 보라색 이 됐네요."

'... 잠깐. 근데 가만히 있어도 살이 보라색이면 문제가 있는 거 아냐?'


그렇게, 깼다.


별 희한한 꿈까지 꾸면서 보라에 집착하게 되었다.


근수축과 이완이 뇌의 시냅스 신경계의 신호와 맞물려 폭발적인 타이밍을 만들어 내는 순간 색깔이 변한다.

중요한 건 몸의 보라색 부분은 파란색처럼 정지하지 않고, 살아있는 파동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그 순간만 온몸으로 에너지를 보낸다.


듀라셀이 내는 힘은 단순한 근력과 지구력의 문제가 아니라 근육과 신경 호흡이 동시에 하나로 완벽한 타이밍이 이었다.


써놓고도 이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결국 필요한 건 추론이 아니라 '증거'였다.

그가 어떤 훈련을 하는지 우튜브와 듀라셀의 인터뷰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오랜만에 진천 선수촌으로 내려가 이준승 코치님을 만났다.


혹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잘 지냈냐?"


"네. 일본에서 경기는 아까웠어요."


"그러게 결승에 한 명도 못 올려서 더 아쉽네."


"코치님, 듀라셀 경기 보셨죠? 저는 좀 충격 먹었어요."


"세계 신기록이었으니깐."


"미국과 우리나라 훈련이 많이 다른가요? 아니면 그냥 듀라셀이 인간이 아닌 건가요?"


이준승 코치는 잠시 웃다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요즘은 과학적으로 훈련해서 전체적인 틀을 놓고 보면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차이가 있다면 맞춤형 훈련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 맞느냐 그게 중요한 거 같아."


사가지고 간 아아를 한잔 마시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가 애들 재활훈련과 트레이닝시킨 후 달라진 모습을 곰곰이 생각해 봐.

너 같은 애들이 선수 개개인마다 다 달라붙어서 훈련시켜 준다고 하면 기록은 좋아질 수밖에 없지.

문제는 스스로 '뭐가 맞는지 ' 깨닫고, 그걸 팀이 제대로 된 피드백으로 돌려줄 수 있느냐야


우리나라는 아직 훈련 스케줄과 시스템을 주면 거기에 맞춰서 하지"


"아! 맞아요 우리나라 감독 코치와 선수들 간 특유의 위계질서 때문이죠."


"선수마다 몸의 능력치, 주종목, 근육의 반응 속도가 다 다르고, 어떤 선수는 폭발적인 스타트가, 어떤 앤 후반 지구력이 무기인 선수도 있고.

이런 걸 잘 파악하고 설계해주는 게 감독, 코치와 선수들 간의 역할인데....

넌 이거 이거 부족하니깐 이렇게 해! 그러면 네! 하는 거지."


"그래서 코치님이 오신 뒤부터 역대 최고성적내고 있잖아요."


"흐흐흐 잘하는데?

그리고 인정할 건 해야지 듀라셀의 능력은 넘사벽이지

피지컬 봐봐 타고난 근섬유와 폐활량, 골격구조까지 거기다 훈련 시스템까지 받쳐 주니깐

그런 괴물이 탄생한 거지."


"그럼 결국 종이 다르기 때문에 코치님은 우리나라 선수들은 극복할 수 없다고 보는 건가요?"


"아니 신체조건이야 우리도 이제 안 밀려. 단거리 범영이 봐봐 걔 키가 197CM 윙스팬이 218CM야

우리나라에 이 정도 '노'를 가진 선수는 처음이지 아마? 잘만 키우면 듀라셀을 능가하는 선수가 될 수 있어 그리고 앞으로 이런 선수들은 더 늘 거고."


"코치님이 보기엔 전 어때요? 진지하게 내년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면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요?"


"......"


"알겠습니다. 대답 감사합니다."


"하하, 아냐 정호 넌 턴이 부족해서 50M 종목이 잘 맞을 것 같고, 그 이상 넘어가는 종목은 평영이 괜찮을 거 같은데. 50M가 자유 몇 초지?"


"23초 93요."


"그 후에 재봤어?"


"네. 계속 훈련도 하고 여러 대회 나가봤는데 안 줄어요."


"너 단거리 애들 봤지? 게네들처럼 빵 더 키우고, 반응속도, 파워가 더 필요해.

아! 내년에 듀라셀 팀에서 상반기 캠프 연대. 일주일 정도 같이 훈련하는 프로그램."


"훈련 캠프요? 그럼 저도 지원 가능해요?"


입꼬리가 올라가며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끄덕였다.


"누구나 신청할 순 있지만...

기본적으로 세계주니어 선수권이나 국제무대 출전 경력 있는 선수를 우선으로 뽑는 거 같은데...

한마디로 기록과 커리어가 최소 기준이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넌 다른 카드가 있잖아. 이미 국가대표랑 같이 훈련도 하고 재활트레이너로서 충분한 '성과'를 내었잖아

그 부분을 잘 어필해.

참가 신청서에 단순히 기록만 적는 게 아니고 너가 어떤 선수인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써야 돼"


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듀라셀 선수와 같이 훈련하는 모습은 상상으로도 잘 안 그려졌다.


(카페)


"어때?"


"너 이거 번역기 돌렸지?"


카페 한쪽 창가에 앉아서 다영 누나는 내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크크크, 네에. 내가 누나처럼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잖아. 이게 최선이었어. 근데 꽤 괜찮지 않아?


"요즘 번역기 성능 좋은 건 인정."

그녀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어색한 문장이 꽤 있네, 오타도 그렇고.."


"누나 부탁할게. 오네가이시마스"


오랜만에 '껀수?'를 핑계로 바쁜 다영 누나를 불러냈다.

살은 빠졌지만, 얼굴은 더 빛이 났다.


"미국까지 가서 훈련할 거야? 이제 아예 수영선수로 전향?"


"아.. 아니 그건 아니고, "

사진첩에서 듀라셀 선수의 사진과 영상을 보여줬다.

"일본에서 이 선수를 보고 어떻게 훈련하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이야~ 짐승남이네."

사진을 확대하며 감탄했다.


"나도 반했지. 이 선수랑 같이 훈련하면 노하우도 배우고,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훈련방식이랑 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일 중요한 건 제24초 벽을 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장소가 플로리다네?"


"가봤어?"


"아니. 난 보스턴에 있었지. 플로리다 한 번가보고 싶었는데.. 미국에서도 지상낙원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에서 플로리다는 무조건이지."


"누나도 놀러 가자! 만약에 되면 이거 일주일 짜리니깐 끝나고 며칠 같이 즐기자아 지상낙원에서."


짧게 망설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까? 논문도 이제 막바지라 내년 초면 시간이 될 것 같긴 한데..."


"잘됐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깐 자신에게 선물 정도는 줘야지."


"뜬금없네 근데."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인생은 언프리딕터블이잔아

나도 내년이면 취준생이라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다고."

"넌 이거 붙을 거를 확신하는구나?"


"못 붙어도 난 일단 갈 거야. 가서 그 수영장에서 듀라셀 훈련하는 모습을 봐야겠어."


"그래. 여행 가는 건 그때 생각해 보고 이거, 내일 저녁쯤 내가 고쳐서 메일로 보내줄게."


"역시 누나 밖에 없어."


'순간 사랑해라고 고백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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