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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Mar 31. 2021

그들의 외로움은 어디서부터 시작된걸까- 디태치먼트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던 실패가 주는 교훈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내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by 알베르 까뮈


세상엔 많은 직업이 있지만 끝에 '님' 자를 붙이는 직업은 한정적이다. 실제 그 사람의 성격이나 지위가 어떻든 관계없이 직업 그 자체만으로 존경과 대접 받는 듯한 직업 중 하나 '선생님'.


영화 <디태치먼트>는 한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는 기간제 교사의 삶을 추구하는 '헨리' 의 고민과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교육 현실을 토하는 작품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교사를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는 어느 정도의 선은 지켜왔다 생각하는데, 갈수록 그들의 권위와 지켜져야 할 선이 무너지는거 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 일까. 특히 이런 느낌은 규제가 많지 않은 미국에서 더 그런듯 하다.


과연 이 영화는 떨어져버린 교육 현장의 우울함을 비난하는 영화일까.


Detachment : 무관심한, 신경쓰지 않는, 독립된



각자의 삶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외로움일뿐...

작품은 다큐멘터리와 영화의 중간 즈음이랄까, 이 두 장르의 연출을 혼합하고 있다. 오프닝부터 자신들이 직접 겪었거나 건네 들었던 교사들의 처절한 상황을 말하는 인터뷰가 시작되고.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듯한 절박한 상황에 좌절하는 학교의 모습을 주인공 '헨리' 가 힘 없이 나레이션 한다.


공부만 열심히 해서 졸업하면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의 전문 분야를 열심히 학습하여 전문가가 되는 것은 필수지만, 교사에게는 학생들을 성숙시켜야 할 자질 또한 필요하다. 바뀌어가는 트렌드와 함께 학생들의 보편적인 인식도 바뀔 것이며, 교사들은 일부는 변화에 맞추되 일부는 변질되지 않도록 붙잡아야 할 것이다.


작품 속 여러 교사들은 무능력해보이기도 한다. 힘 없어 보이는 교장을 비롯하여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며, 말 한 마디 내뱉는 것도 이젠 지쳤다 싶은 느낌의 교사들. 교사와 학생이 만들어가야 할 학교의 활기찬 에너지를 분해시킨건 누구인가. 교사들은 처음 교편을 잡기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 무기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매년 반복되는 상황에 지쳐버리는 바람에 그들 자신도 소중한 인격체로써 긍정적인 에너지를 잃은 것일 수도 있다.


학생들은 너무 공격적이며 멋대로이다. 또한 직설적이다. 학생들끼리도 '함께, 우리' 라는 개념은 보이지 않으며 그저 각자 독한 성격을 가진 반항아들로 비춰질 뿐이다.


아무나 부모가 될 수 있진 않다,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교의 문제도 있겠으나 '헨리' 는 모든 근원을 <부모들의 잘못된 역할> 로 보고 있다. 어느 누구도 '학부모의 날' 의 학교를 방문하지 않으며, 아이가 문제를 겪었을 때에는 그 잘못을 모두 학교에만 밀어붙이려 한다. 무기력함에도 학생들을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는 교사들은 최소한의 자격은 갖췄지만 부모들은 그렇지 않은 듯 보인다.


충분한 소통과 이해, 사랑과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같은 또래가 모여있는 곳에서도 독립적이며, 서로의 깊은 뜻을 나누지 못한채 계속 힘을 잃어가는 교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한 공간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각자 떨어진 섬이며 위태위태하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불안해요,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모두가 저녁과 휴일에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겠지만 삶의 대부분을 일하는 시간에 투자하느라 그것이 온전히 보장받아야 할 휴식 시간에도 영향을 미쳐 점점 침식되고 만다. 게다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니, 그들의 다른 삶은 어떠한지 알지도 못 한 채, 각자가 가진 분노 등의 감정을 쏟아낼 뿐이다.


방황하는 소녀 '에리카', 독특한 컨셉으로 따돌림 당하는 '메디스'.

주인공 '헨리' 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면서 외로운 두 소녀. 허나 '헨리' 는 두 소녀 모두에게 같은 크기의 관심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게 되었다.



구원자 또한 외로운 존재일 뿐...

'헨리' 는 가장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는 정직원이 되기 보단 누군가의 빈 자리를 잠시 채울 뿐인 기간제의 삶을 선호한다. 학력, 인성적으로도 괜찮은 이 남자는 어째서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채 게속 거리를 둬가며 살아가는 것일까. 마음 속에는 진지하게 정착하고 싶으나 어째서 실행으로 옮기진 못하는 걸까.


그것은 어머니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린채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렸을 테고, 결국 그녀의 선택은 과다 복용에 따른 죽음. 그 죽음을 바라본 '헨리' 와 그의 할아버지. 병상에 누운 할아버지는 정상이 아니며, 딸에게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갇혀 산다. 그런 그에게 '헨리' 는 일기를 기록하고 있는지를 계속 확인하지만 어느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나의 삶은 기록할 필요가 없어, 별거 없거든.


대체 할아버지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계속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인지 명확히 보여주지는 않으나, '헨리'의 대사를 통해 왠지 성적인 문제 (예를 들면, 근친상간) 를 일으킨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게 믿었던 가족이 가족을 죽게 만드는 배경을 제공하고, 죽일듯이 밉지만 어쨌든 가족이기에 용서해줘야 하는 상황. 그래서 '헨리' 는 계속 일기장을 통해 할아버지가 스스로 반성하게끔 만들려 하지만 모든걸 기억조차 안 하려는 그의 모습에 더욱 답답해졌을 것이며, 그렇기에 교사 이면의 생활은 어둡고 답답하기만 할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 있기에 방황하는 소녀 '에리카'를 집으로 데려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모습. 감정 이입이 가장 많이 된 학생일 것이다. 똑같이 만들고 싶지 않기에, 이후의 지옥같은 삶을 알고 있기에 그녀를 도와주는 '헨리' 는 선생과 인생 선배라는 두 모습에 있어 이상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메레디스' 는 그렇지 않다. 부모의 관심은 커녕 비난만 받는 그녀의 상황을 '헨리' 는 모른다. 하지만 가장 얌전하면서 차분해 보이는 소녀. 그녀는 '헨리' 에게 마음을 품지만 '헨리' 는 끝내 그녀가 원하는 정도의 감정 피드백을 주지는 못 한다. 자신은 곧 학교를 떠나갈 것이기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보다 함께 살고 있는 '에리카' 만큼 '메레디스' 와는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에 사정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가장 이상적이면서 방황하는 학생들의 구원자로 보이는 '헨리' 또한 혼자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존재다.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 했으며, 깊게 관계 함으로써 찾아오게 될 감정과 상황을 견디지 못할 거란걸 잘 알기에 그는 계속 거리를 두며 떠다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학생들 아닌가.



연속성의 부족은 의도된 것인가...


중간중간 툭툭 끊기는 전개는 감정의 연속성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여러 명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도 좋고, 모든 걸 '헨리' 의 시점에서 독백하는 구성은 괜찮을지 모르나 한 시퀀스에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짧은건 아닐까. 고립된 각자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헨리' 를 제외하고, 다른 인물들의 감정 이입은 어려웠다.


어째서 '에리카' 같은 거리의 방랑자가 몇 번의 친절을 통해서 개과천선 해 나가는지. 그런 따뜻한 마음이 생기게 된 그녀의 트라우마는 무엇인지. '메레디스' 또한 마찬가지다. 너무 단편적이면서, 절망에 빠진 그녀들과 함께 지내며 웃기도 하고, 감정의 혼란에 빠지는 '헨리' 와의 연결 고리는 와 닿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저 좋은 선생님이라는 이미지는 남겨졌을지언정, 치유되어야 할 인물로써의 모습은 약하다. 결국 각자의 우울한 상황을 나열 했을 뿐, 이를 치유해가는 과정이나 과거의 악몽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지는 않은채 '헨리' 의 나레이션 톤에 따라 우울한 상황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전개는 아쉽다.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치료제이다. 진심으로 굳건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숨겨진 트라우마를 공유해서라도 치유될 수 있다 생각한다. 소통의 노력 없이 상황에 억눌려 고립된 삶을 택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선택의 문제이다. 외딴 섬이 될 것인지, 함께 살아갈 것인지.


현재 우리는 쓸데없는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귀찮아 하는 나의 문제인지, 사회의 문제인지. 나는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성질은 제각각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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