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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Jun 16. 2022

한라산, 제주 바다 보다 귀한 사람 사는 맛

우리들의 '제주'블루스

춘희 할망의 손녀 은기가 제주 푸릉마을에 떴다. 춘희 할망의 하나뿐인 아들 만수가 사고가 나 중환자 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며느리가 춘희 할망에게 아이를 맡긴 것이다. 해녀인 춘희 할망의 또 다른 일터인 시장에서 누구네 집 며느리가 바람이 나 아이를 두고 갔다는 둥 주책없는 다른 할망들이 터무니없는 얘기들을 늘어놓자 춘희 할망은 잔뜩 화가 났고 엄마가 자기를 버린 게 아니라고 우는 은기는 속상하기만 하다. 우는 은기의 기분 전환이 절실한 동네 삼춘들이 차례로 은기를 목마 태워 준다. 만수 똘래미(딸)이면 내 똘이라 하면서. 은기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꽃이 피었다.


지난 5월 29일에 방송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6회의 한 장면이다. 제주는 사실 그런 곳이다. 시내는 사정이 조금 다르지만 드라마 속 푸릉마을처럼 촌에 자리한 동네에서는 흔한 일이다. 마을마다 누구네 집에 밥 숟가락이 몇 개인지, 자식들이 어디서 무엇하며 다니는지, 누가 바람이 나서 이혼을 했는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곳이다. 꾸밈이나 거짓이 통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삶이 진솔해지는 바로 그런 곳이다. 제주에서는 처음 보는 사이라고 해도 말 두어 마디 섞다 보면 어떻게든 엮이게 되어있다. 두세 명 만 건너면 서로 다 알고 어른들은 다 '삼춘'이다. 식당에 가도 '이모!'가 아니라 '삼춘!' 하고 부른다. 삼촌이 아닌 삼춘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정겨운가!

<tvn, 우리들의 블루스. 정준의 무등을 타고 있는 은기와(좌) 잠든 은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망들(우).>


그러나 제주 토박이가 아닌 나는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제주 특유의 친밀감이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다. 이름 석자가 아니라 누구네 집 메누리(며느리)로 소개되고, 제사 같은 집안 행사에 메누리가 왔는지 살피는 마을 어르신들의 시선을 느끼는 상황이 불편했다. 회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주에는 왜 오게 되었는지, 시댁은 어디인지 호감과 호기심이 담긴 질문들을 하는 동료들에게 피로감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두 마디 오가다 보면 남편이나 시댁과 연결 고리가 생기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혹시 OO알아?'하고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오, 어떻게 아세요?' 하고 반갑게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지나간 시간들을 되감아 보곤 했다. 그간 나에게만 속했던 말과 행동들이 동료와 나 사이에 생겨버린 연결고리를 타고 누구 아내, 누구네 메누리의 말과 행동으로 순식간에 영역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제주살이 7년 차에 접어들자 처음 제주에서 느꼈던 낯선 감정 대신 친근함이 자리 잡았다. 직장에서 스스럼없이 개인사도 터 놓을 만큼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도 생겼다. 이제는 누가 누구를 안다고 해도 놀라지 않는다. 제주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긴밀하게 얽혀있는 곳임을 살면서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가까이 온기를 느끼며 사는 즐거움은 제주살이의 특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물론 서로 무례하지 않는 선에서)


덩달아 아이도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중이다. 아기를 보면 '아기 본 값'이라면서 아이 주머니에 과자값을 찔러 넣어주시는 분들이 지금도 많다. '아이고 잘도 아꼽다이!' 하시는 말끝에 꿀보다 달콤한 정이 뚝뚝 떨어지고, 토닥토닥 궁둥이를 두드리는 손끝에 따뜻함이 묻어난다. 아이가 신나서 '고맙습니다!' 하고 꾸벅 인사를 하면 또 '아이고 잘도 착허다이!' 칭찬 세례가 끊이지 않는다. 동백처럼 바알간 웃음꽃이 아이 얼굴에 지천으로 피어난다.


제주에 홀로 외떨어져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외롭다고 느껴지는 날들도 있었다. 그런 나를 위해 친구를 자처해주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남편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이다. 덕분에 아이는 '삼춘' 풍년이다. 크리스마스며 어린이날이며 삼춘들에게서 받았던 선물에 대한 보답을 하려면 뒤따라 태어난 동생들을 잘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인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제법 동생들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있다.


흔히 친구들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남편은 친구들 덕을 톡톡히 보았다. 연애 시절 친구라면서 소개해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잘 우러난 곰탕처럼 진국이라서 남편에 대한 신뢰도와 호감도가 급상승 곡선을 탔으니 말이다. 가깝게 지내며 자주 만나는 친구 부부 중 두 커플이나 대학 때 만나 결혼까지 이어진 경우라서 6년의 연애기간을 둔 우리 부부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어디 가서 쉽게 하지 못하는 남편 흉보기도 이들과 함께라면 거침이 없다. 흑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 서로 앞에서 점잖은 척 시치미를 떼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날 때마다 이들은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나 또한 그 여행에 동참하는 재미가 '아마존 익스프레스' 급이다. "머리, 어깨, 무릎, 발끝 다 젖습니다, 추억에 젖는 겁니다!"

< 한결같은 친구들, 한결같은 마음들. 아이가 우리 아이 한 명이었다가(좌) 지금은 세 명이 되었다(우) >

'드라마니까 그렇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저런 데가 어디 있겠어!' 하고 생각한다면 아니라고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춘희 할망(고두심 역), 옥동 할망(김혜자 역), 은희(이정은 역), 영주 아방(최영준 역), 현이 아방(박지환 역), 동석(이병헌 역), 정준(김우빈 역) 같이 정 많고 푸근한 사람들이 실제로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종료되어 이제 '푸릉마을'을 더는 볼 수 없지만 '우리들의 블루스'는 계속 이어진다. 지금, 여기, 온기 가득한 나의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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