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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Feb 02. 2022

명절의 끝에는 특급 라면이 필요해

새해의 들뜸은 가라앉히고 평범한 매일을 살아내기 위하여

주말을 앞 서 쉬고 설 연휴까지 5일을 내리 쉬었다. 긴 연휴는 오랜만이었던 만큼 반가웠고 손으로 꼽으며 기다렸던 만큼 빨리도 끝이 났다. 내일부터는 새 해의 설렘도 평범한 일상에 완전히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연말에 시작되어 신정을 거쳐 구정까지 지나고 가면 새 해라고 한껏 들떠있던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는다. 빵빵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휘저어둔 식혜에서 밥알이 저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랄까?


코로나로 식구들만 간소하게 지내는 명절이었지만 차례를 지내야 하니 음식 장만이 빠질 수 없다. 돌아가신 시할아버지께서 좋아하셨다던 더덕튀김이 이번 명절 음식 중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다. 손끝이 야무진 시동생이 더덕과 오징어튀김을 전담한 덕분이다. 남편은 나랑 짝을 이루어 지짐을 하고 옥돔 8마리를 구웠다. 시아버님이 설거지를 도맡아 하시는 모습이 모든 며느리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명절 풍경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겠지만 내가 우리 집의 며느리인 동안에는 미완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남편과 시동생이 있으니 결국에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설 날 차례를 위해 장만한 음식들>

제주에서는 고기산적을 지지는 방식이 특이하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중지 손가락보다 조금 길게 잘라 꼬지에 꽂은 후 양념을 해서 지진다. 어릴 적 큰집에서 보았던 네모난 고기 산적의 모양과는 사뭇 다르다.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치와 소라, 전복 꼬지는 육지에서는 보지 못했던, 바다와 밀접한 제주도의 지역 특색이 반영된 음식들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던 육지 며느리였는데 이제는 '제주댁'이 다 되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장보기와 양념재는 일은 오롯이 어머님께서 하고 계신다. 이 큰 일들이 내 차지가 되는 일이 되도록 천천히 오기를,  (양가)부모님께서 부디 든든한 버팀목으로 우리 곁에 오래 계셔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소고기 산적은 웬만한 스테이크보다 맛있다>
<돼지고기는 노릇노릇 구석구석 잘 익혀야 해서 시간이 오래걸린다>
<한치와 소라, 전복은 제주 지역색이 짙은 차례 음식이다>

차례를 지내고 차례상에 올랐던 음식을 그대로 반찬으로 먹다 보니 떡하는 날(명절 하루 전 음식 하는 날)과  명절 당일까지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이 숙명이나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도 있다. 시댁에서는 옥돔을 넣어 미역국을 끓이는데 그 맛이 베지근하고* 찹쌀떡을 기름에 지지는 '기름떡'도 명절 음식으로는 빠지지 않는 별미이다.

* 베지근하다는 맛 표현은 고기 따위를 푹 끓인 국물이 구미가 당길 정도로 맛이 있다는 제주어다.(차례상에 올리는 국을 제주에서는 '갱'이라고 부른다.)

<옥돔 미역국과 기름떡. 옥돔 미역국 먹을 때는 생선 가시를 조심해야 하고, 기름떡은 꿀에 찍어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이다>

명절을 시댁에서 지내는 이틀 동안 뱃속을 기름진 음식으로 꽉꽉 채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음식이 바로 라면이다. 명절을 다 지내고 우리 집으로 돌아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스레인지에 물을 담은 냄비를 올린다. 라면을 끓이기 위함이다. 느끼함과 더부룩함을 잡아줄 우리 부부만의 특급 레시피는 바로 신라면2개+틈새라면 김치맛 1개에 대파를 듬뿍과 청양고추 1-2개를 썰어 넣는 것이다.(우리만 라면을 먹을 수는 없으니 아이는 맵지 않은 사리곰탕이다.)

<여러번의 시도 끝에 정착하게된 특급라면 조합은 신라면2, 틈새라면1>

알싸하게 매운 라면 국물이 뜨거움을 간직한 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 구석구석 남아있던 기름진 맛을 씻어주는 기분이 든다. 그야말로 시원하고 개운하며 연휴 동안 늘어져있던 몸과 마음까지 흔들어 깨우기에 충분히 매콤하다. 이제 연휴는 끝났으니 내일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신호탄의 맛있는 공습이다.


설이 지나자 새 해도 어느새 1월에서 2월로 바뀌어 있다. 어영부영하다 올 해에도 잊고 넘길 것 같아서 서둘러 오랫동안 멈추었던 어린이 후원을 바로 신청했다.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월드비전에 해외아동 후원을 3년 동안 했었는데 입직하고는 공부할 때보다 더욱 빠듯한 월급과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 중단을 했었다. 남편이 재취업 준비 중인 지금은 사실 그때보다 더욱 빠듯한 주머니 사정임은 분명하지만 아이가 건강히 잘 자라고 있는 만큼 감사함에 대한 표현을 더는 미루지 않기로 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점점 더 늘려갈 예정이다>

이번 설날이 누군가에게는 가족과 함께 지낸 소중한 시간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노동과 불평등으로 점철된 고된 시간으로 남을 테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나누어 준 날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아직은 추운 겨울, 우리의 온기를 나누어 따뜻한 봄날을 조금 빨리 마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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