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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Jan 09. 2022

제주 '비밀의 숲'에서 느리게 걷다

찐 제주도민은 모르는 제주 핫플

제주에 살게 된 이후 가장 난감한 질문 중에 하나가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것이고 1+1으로 따라붙는 질문이 맛집 추천이다. 그들이 질문을 할 때 나에게서 성산일출봉, 사려니숲길, 비자림 같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유명한 관광 명소가 나오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쯤은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입은 답변을 머뭇거리고 쉬이 열리지가 않는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렵게 꺼내 든 정답 카드는 이러하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주살이 0년 차에는 늦은 일요일 오후라도 녹차라떼가 먹고 싶으면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서쪽 오설록으로 차를 타고 달렸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서귀포에 정방폭포를 보러 길을 나서고, 일몰에 취하고 싶은 날에는  신창해안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붉은 노을과 바다와 풍차의 멋들어짐에 빠져들곤 했다. 비행기표나 호텔을 예약하지 않고도 제주의 살아있는 순간을 만끽하며 '아, 내가 제주에 살고 있구나!' 하고 감탄하곤 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같이 보는 한라산의 위풍당당함이 당연해졌고, 삼양 바닷가의 눈부신 일렁임에도 큰 감흥이 없다. 그저 출근길과 퇴근길의 단상일 뿐이다. 해안도로 따라 보이는 성산일출봉은 이제 시댁에 다 와간다는 이정표가 되었고, 주말 아침 사라봉을 산책하고, 오후에는 절물에 나들이를 가는 일이 특별하지 않다. 제주에 살고 있으니 시간에 쫒기지 않고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여유로움이 게으른 행동으로 이어졌다. 찾아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제주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제주는 여전히 신비롭고 내가 제주를 사랑한다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았다. 다만 제주는 설렘을 안겨주는 여행지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 되었을 뿐이다. '남자친구였다가 남편이 된' 제주도랄끼?


우리집에 엄마가 오셨다.

지난 수요일에 엄마가 거의 1년 만에 딸 내외 집에 오셨다. 외할머니가 오신 덕분에 아이는 목, 금요일 이틀동안 어린이집을 자체 휴원했고, 엄마가 오신 덕분에  나는 밀린 업무를 하느라 야근을 했으며 장모님이 오신 덕분에 남편은 육아부담을 벗고 늦게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남편이 공부하는 중이다보니 야근할 일이 생길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꼭 필요한 때의 엄마의 방문이 크리스마스 선물보다 반가웠다. 주말이 되었건만 이틀 동안 야근을 했더니 몸이 피곤했던지 토요일에는 흐린 날씨를 핑계 삼아 낮잠을 좀 잔다는 게 하루를 다 보낸 꼴이 되었다.

- 엄마, 내일은 어디 좀 나가볼까?

- 허재가 지금 제주도에 있댜. 멋있는 데 갔다면서 oo아줌마가 집에만 있지 말고 거기 가보래.


엄마는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마치 준비한 대답이었던 것처럼 말을 이었다. 멀리 떨어져 사는 탓에 쉽게 만나지 못하는데 코로나까지 겹쳐 더욱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지냈던 터이다.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관광을 하러 제주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집 안에만 머무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 '허재 제주도'로 검색하니 관련 기사가 금새 눈에 띄었다. 방송 촬영차 제주에 왔나보다. '성산일출봉하고, 동백꽃 보러 갔네... 또 어디 보자. 응? 비밀의 숲? 제주도에 이런 데 가 있나?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명칭은 낯선데 어딘지는 금방 알 것 같았다.

- 여보, 여기 봐봐. 여기가 비밀의 숲이라는데 여기 거기 맞지? 촌에 갈 때 왜 렌트카들 많이 세워져 있고 좌회전해서 들어가는 데 있잖아. 거기 같은데? 왜들 저기를 가나 했더니 이런 곳이 숨어있었고만.


'비밀의 숲'에 가다.

일요일에도 해는 구름 뒤에 숨어 숨바꼭질할 뿐 방긋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오전에는 집 앞 건천 주변을 산책하고 두시가 다 돼서 나설 채비를 했다. 익숙한 길을 달려 우리가 예상했던 곳까지 왔다. 그런데 목적지는 좀 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맞는 걸까? 의구심이 들 때쯤 즐비하게 늘어선 차들이 이곳이 우리가 찾는 '비밀의 숲'임을 알게 해 주었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비밀스러운 장소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걸까? 제주는 아마도 제주도민보다도 여행객들이 구석구석 잘 찾아다니며 핫플레이스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르겠다. 민트색 지프차와 미니 캠핑카가 숲의 입구에서 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곳은 '사유지'였고, 입장료가 있었다. 유채꽃이 시작되는 2022년 2월부터는 가격이 인상된다는 안내문도 쓰여있었다.

<숲과 꽤 잘어울리는 컬러 초이스, 굿! 감각적인 매표소.>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빽빽한 편백나무들의 모습에 눈길이 사로잡혔다. 날씨가 쨍했다면 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더욱 푸른 자태를 뽐냈을 텐데 하늘은 여전히 희뿌연 게 영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여행객의 마음으로 모든 순간을 즐기리라 마음먹었다.  초록숲을 보니 아무리 나쁜 바이러스라도 이곳에서는 정화되어 착한 바이러스로 다시 태어나겠구나 싶었다.(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맑은 나무의 기운이 땅에서부터 올라왔고 흙길을 오랜만에 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드라운 흙 위에 서 있자니 마음이 말랑해지는 듯도 했다. 우리의 삶은 주로 딱딱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사이 어디쯤이 아니었던가.

<쭉 뻗은 편백나무들이 울창하고 고즈넉한 숲길을 이루었다>

오랜만의 야외에서의 휴식은 아이에게는 보물찾기 같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아이는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넘어져도 툭툭 털며 일어났고 더러워진 옷과 신발은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았다는 방증이 된다. 아파트에 살면 아무래도 뛰지 마! 조용히! 를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한 번씩 에너지를 발산하게 해 주는 날이면 아이는 신나고 아이에 대한 죄책감은 조금은 수그러든다. 엄마도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편백나무 향기를 가득 품었다. 제주 사는 딸 내외와 손주를 보러 온 엄마에게 여행은 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국이 종식되어 덤이 주는 행복을 더욱 마음껏 누리셨으면 좋겠다.


<빽빽한 숲과 가려진 하늘과 여유로운 오후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숲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고 화장실이나 카페 같은 편의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편안함을 위해서 자연을 훼손해야 한다면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들이 만들어준 울창하고 고즈넉한 숲 한가운데 서 있자니 시간을 느리게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드리운 포근한 날을 상상해보니 주변에 따뜻한 주황빛이 도는 듯도 했다.


숲 곳곳에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존도 만들어져 있었다. (언제쯤이면 마스크를 벗고 사진을 찍을 수 있을는지.. 방역수칙은 야외에서도 지켜져야 합니다.) 연인, 친구들과 함께 숲을 찾은 이들의 웃음소리와 풋풋한 기운이 우리에게까지 스며들자 잊고 있던 여행의 기쁨이 되살아났다. 그래, 우리 제주에 살고 있었지!

반복되었던 평범한 오후가 '반짝'하고 빛이 났다. 닿은 발걸음이 소원이 되어주기를 염원하는 이들의 정성이 가득 깃든 돌담길에 우리의 바람도 하나 얹어보고,  미끄러워진 길을 걸을 때는 아이가 넘어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았다. 우리들의 시간이 '비밀의 숲'에 흔적을 새기는 중이었다. 오래 기억에 남도록 한 걸음씩 꾹꾹 누르며 걸었다.

<돌담을 찾은 많은 이들의 소원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블루보틀'에 가다.

돌아나오는 발걸음에 무겁게 끌려오는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블루보틀'에 가기로 했다. 지난 가을에 송당에 블루보틀 국내 6호점이 생겼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오늘만큼은 여행자가 되기로 한 이상 커피 한 잔을 위한 기다림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밀의 숲에서 멀지도 않았다. 예상대로 바로 입장은 불가능했고 매장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따뜻한 라떼 두 잔과 블루보들의 시그니처인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주문해서 테이크아웃하기로 했다.

<블루보틀 전경과 드립커피를 내려주는 바리스타님. 바리스타님께 동의를 얻어 촬영했다.>

테이크아웃이라고 해도 매장 안에서 먹는 것과 동일하게 기다림의 시간은 필요했는데 요즘의 웨이팅은 몹시도 스마트했다. 번호표를 받아 든 뒤 한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입구에 놓인 태블릿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기다리면 카카오톡으로 입장 차례를 알려준다. 엄마는 이런 시스템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다. 누군가에게는 편리함이, 다른 이에게는 특히 노인과 같은 약자에게 불편함일 수 있는데 불편한 상황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는 방식이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기다리는 사이 주문한 음료가 나왔는데 라테는 고소했고, 핸드드립은 향이 짙고 맛이 깊었다. 맛에 대한 본능과 의식의 흐름 사이에서 잠시 혼란했다.


'효섬마을 초가집'에 가다.

여행의 백미는 먹거리 아니겠는가. 저녁은 전복돌솥밥을 먹기로 했다. 검색으로 찾은 맛집이 아니라 원래 알고 있던 밥집으로 가기로 했다. 회사에서 점심 먹으러 종종 오는 곳으로 맛이 보장되었으니 홍보용 포스팅에 낚여서 실패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전복 가득 올라간 돌솥밥을 그릇에 옮긴 후 물을 부어 두면 밥을 먹는 동안 구수한 누룽지가 만들어진다. 밥은 전복과 함께 구운 김에 싸서 간장에 찍어먹으면 엄지가 척 올라가는 맛이다. 샐러드는 유자 소스로 버무려져 상큼하고 반찬들은 정갈하고 깔끔하다. '찐도민맛집' 인증이다.

<효섬마을초가집은 진짜 초가집을 떠올리게 하고터줏대감 멍멍이들이 반겨준다.>
<사진에 소질이 없어 먹음직 스럽게 찍지 못했지만 맛은 일품이다.>


늦게 시작한 오후의 소풍은 짧게 끝났지만 순간을 붙잡아두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오래 남을 것 같다. 전에는 유모차에 실려 다니거나 업혀 다니던 아이가 뛰어다닐 정도로 자랐고 엄마는 그만큼 나이가 드셨다. 엄마는 또 엄마의 나이는 생각도 못하고 딸이 벌써 마흔 하나가 되었다며 놀라신다. 엄마가 더 연세 드시기 전에 눈이 호강하고 입이 호사를 누리는 일을 많이 만들고 싶다. 아이의 시간에, 엄마의 기억에 좋은 추억을 가득 담아주고 싶다. 제주도민과 여행객의 삶이 꼭 분리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상의 두근거림을 간직한 채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제주도민이 되어보아야겠다.


여행 전문 작가는 아닙니다. 오늘 하루의 소회를 담아냈습니다. 방문지는 모두 개인 돈으로 직접 지불하고 방문하였으며 주관적인 견해를 담았습니다. 방문에 참고하셔요 :)


비밀의숲

제주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2173

http://naver.me/xWNioJvU


블루보틀 제주 카페

제주 제주시 구좌읍 번영로 2133-30

http://naver.me/FWJt8B46


효섬마을초가집

제주 제주시 명림로 243

http://naver.me/F1pxFs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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