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인프라 구축이 시급합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얼핏 운명론처럼 들리는 이 말을 신봉하는 건 아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않는 대로 언젠가는 잘 되겠지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예정에 없던 일이 일어날 때는 또 그런대로 그 일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됐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도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 3월 15일 둘째를 출산했다. 사실 작년에 둘째의 임신 소식을 알았을 때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내 나이 마흔하나였고 첫째와는 여섯 살 터울이었으며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나는 쉰 살의 학부모가 될 터였다. 남편은 사정상 일을 쉬고 있었고 임신을 알기 몇 달 전에는 대출도 받은 상태였다. 둘째 계획이 없었기에 가능한 행보였다. 2-3년 전만 해도 둘째를 낳아보려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후에는 마음을 접었다. 큰 아이가 이제 제법 자라 내 손을 타지 않게 되면서 둘째 생각은 아예 사라졌다. 치열했던 육아에서 한발 물러섰을 때쯤 거짓말처럼 둘째가 찾아왔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때가 아니라 지금 둘째가 찾아온 이유가 있겠지. 감사하게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포털에 출산율 3글자를 입력하면 저출산 관련 기사가 쏟아진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시점에서도 불과 3시간 전에 <인구학 권위자 "한국 저출산 지속되면 2750년 국가 소멸 위험"> 의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연합뉴스, 김영신 기자) 2022년 합계출산율이 0.78 명으로 전 세계 최저로 떨어진 상황이라고 하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출산은 더 이상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한 가정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의 존폐를 좌지우지할 지경에 이르렀다. 애초에 출산율을 조절하겠다고 부부 사이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되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1960년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1970년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1980년대).‘ 라니.
이제 하나는커녕 아예 낳지 않는 부부들이 늘어나고 젊은 세대일수록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 추세이다. 요즘은 아이 둘 있는 집이 중산층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리니 그 사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능하다. 언제는 아이 좀 그만 낳으라고 닦달하던 정부가 지금에 와서는 제발 아이 좀 낳으라고 성화이니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누구를 위해 애를 낳으란 말인가? 애를 낳으면 국가에서 보호해 줄 수는 있고?
얼마 전에는 소아과 전문의들이 소아과 폐과를 선언했고 오늘은 다섯 살 아이가 고열로 인해 응급실을 전전하다가 입원 치료를 받지 못해 끝내 숨졌다는 기사가 포털 상단에 떴다. <다섯 살 아이, 고열에 ‘응급실 뺑뺑이’… 끝내 숨졌다, 국민일보, 권남영 기자> 기사를 쉽게 클릭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지난주에 일곱 살 큰 아이가 원인불명의 고열로 열이 40도까지 올라간 일이 떠올랐다. 저녁시간이라 급한 대로 동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고 코로나와 독감은 검사 결과 아니었다. 해열제와 항생제 처방을 받아와서 아이에게 복용시켰더니 다행히 열이 가라앉았다. 열이 잡히지 않을 걸 대비해 우리 부부는 언제라도 응급실로 달려가기 위해 외출복을 입고 차키를 옆에 둔 채 아이 곁에서 쪽잠을 잤더랬다.
어렵게 기사를 읽기 시작했지만 역시 참담한 이야기뿐이었다.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 네 군데를 갔으나 병상이 없더나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치료를 거부했고 다섯 번째 병원에서는 입원 없이 진료만 받겠다는 조건 하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 날 상태가 호전되지 않은 아이가 다시 병원 응급실을 갈 채비를 하던 중에 쓰러졌고 그렇게 작고 가여운 다섯 살 아이 한 명이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빅이슈였던 소아과 폐과 선언과 오늘의 사고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보인다.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현재 의료 시스템으로 자라고 있는 아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출산율을 운운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오는 보육기관의 아동학대 문제의 재발 방지 대책과 맞벌이 부부의 육아를 위한 제도 개선 또한 시급하다. 어린이집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사각지대 없이 부모들이 관찰할 수 있도록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 있을 당시 신생아실에 맡겨둔 아이의 모습을 앱을 통해 24시간 볼 수 있어 더욱 마음이 놓였었다. 이런 시스템을 보육기관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돌봄 교실을 야간으로 확대할 게 아니라 육아휴직의 실질적 보장이나 육아기간 동안 근무 시간 축소 등 부모가 직접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지원 제도가 더 실효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행법에서는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은 본인의 청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아직도 직장의 상황에 따라 마음 놓고 사용하지 못하는 곳이 많다.(남자 직원의 경우 특히 더) 출산과 동시에 부모에게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을 의무 적용하도록 제도가 마련되면 육아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누가 애를 낳으라고 했냐고? 애는 알아서 키우라고? 요즘 세상에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를 낳아놓고도 걱정이다. 지금 우리 가정만 하더라도 나라에 내는 세금이 어마어마하다. 세금의 용도가 무엇인가? 나라의 복지 인프라 구축 아니겠는가? 현재도 등골이 휘는데 우리 아이가 성인이 될 쯤에는 얼마나 더 많은 세금을 감당해야 할지 벌써부터 안쓰럽다. 이 아이들이 부양하게 될 노령인구는 안타깝게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 우리들이다. 기존 인구의 기대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태어나는 아이들은 없으니 경제 활동을 해야 할 청년층이 줄어들고, 세수가 줄어들고, 국가의 인프라가 무너지는 악순환이 불 보듯 뻔하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출산은 이미 한 가정의 일을 넘어섰다. 더 많은 지원과 제도 개선을 통해 청년들의 자립을 돕고, 자립을 기반으로 결혼과 출산이 이어질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들의 의식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걱정만 할 게 아니라 태어난 아이들이 걱정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먼저이다. 아기를 낳으라고요? 자라고 있는 아이를 지키는 게 우선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