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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도 샀는데 내 딸이라고 왜 못 사!

엄마라는 히든카드

by 달콤달달

최근에 지인 세 명이 다이슨 에어랩을 샀다. 평소 '에어랩 없이 외출 불가'라며 에어랩 예찬론을 펼치던 나는 두 팔 벌려 그들의 쇼핑을 격하게 반겼다. 에어랩을 사용한 지 3년 정도 되었다. 지금은 에디션도 다양해지고 사용할 수 있는 툴(tool)도 더 늘었지만 내 에어랩은 기본에 충실한 초창기 모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집 앞 가게에서 우유 하나 사듯이 가뿐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가격은 아니라 구입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보통 여자들이 미용실에서 펌을 한 번 하려면 20만 원의 예산이 소요됨을 감안하면 연간 40만 원, 2년이면 80만 원이 든다는 계산 하에 에어랩을 구매하는 것이 미용실에 가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소비가 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태어나서 내 손으로 고데기 한 번 말아본 적 없는 똥손인데 과연 에어랩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 50만 원 만 버리는 거 아닐까? 그다음 고민이 이어졌다.


에어랩이 출시되기 전, 다이슨 드라이어가 나왔을 때만 해도 드라이어가 다 똑같지 하며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존의 드라이어들과는 확실히 다른, 실버+핫핑크색의 예쁜 디자인에 머릿결을 보호해 주면서 볼륨을 살아나게 해 준다는 광고를 볼 때마다 마음이 혹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드라이어 한 대 가격이 무려 40만 원이라니! 우리 집에 있는 3만 원짜리 드라이어도 머리를 뽀송하게 말려주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을뿐더러 드라이어를 가방처럼 들고 다닐 것도 아닌데 예쁜 게 뭐 중요하랴, 드라이어가 다 똑같지. 나는 어느새 여우의 신포도 작전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근마켓에 다이슨 드라이어가 올라오면 보면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고 곁눈질이라도 했다. 욕망에 솔직하지 못 한 자여!


1년 중 몇 번 안 되는 친정 나들이 중에 한 번씩은 오빠네 집에도 간다. 변호사인 오빠네 집은 아무래도 우리 집보다는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롭게 산다. 차도 S클래스이고 집에는 연예인들 집에 자주 보이는 하세드인지 헤세드인지 하는 소파도 있고 탑층에 살면서 옥상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그래서 같은 단지 다른 층보다 훨씬 비싸다) 최고급 브랜드의 텐트를 종류마다 쟁여놓고 기분에 따라 골라 펼쳐두고는 홈캠핑을 즐기기도 한다. 다이슨 드라이어를 처음 경험한 곳도 오빠네 집이다. 샤워를 마치고 파우더룸에 갔는데 빛깔도 영롱한 다이슨 드라이어가 떡하니 눈에 띄었다. 윙~윙~윙~ 소리마저 감미로웠다고 하면 너무 속물처럼 보이려나? 머리카락을 다 말린 후 손으로 만져보니 정말 머릿결이 부들부들한 게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살아있는 듯 볼륨감도 넘쳐나 머리숱이 많아 보이는 효과까지 있었다.(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다)


- 엄마, 엄마! 머리 만져봐 봐. 장난 아니지! 오빠네 집 드라이어 다이슨으로 언제 바꿨대? 돈이 좋긴 좋구먼.

- 왜, 그게 좋은 거간?

- 엄마 요즘 테레비에 광고 막 나오잖아. 근데 비싸. 한 40만 원 넘을 걸?

- 돈 있으니 뭐. 새로 샀구먼 그려.

오빠네 집에서 1박을 하고 다시 엄마네 집으로 가서 며칠 더 쉬고 제주도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엄마가 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편지 대신 50만 원이 들어있었다.

- 가서 너도 하나 사.

- 뭘 사. 돈을 왜 줘.

- 그거 다이 뭔지 하는 거 드라이. 좋다매. 너도 하나 사라고. 며느리도 샀는데 내 딸이라고 왜 못 사.

정말로 그냥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을 한 것조차 이미 잊어버렸는데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인 엄마를 말릴 재간도 없어 봉투를 받아 가방 깊숙이 찔러 넣었다. 눈물 또한 두 뺨으로 흘러넘치지 않게 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각자 분수에 맞게 사는 거라서 오빠네가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사는 걸 딱히 부러워해 본 적은 없다. 오빠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낸다면 한 번 방문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마음도 편치 않을 테니 오히려 좋은 점이 더 많다. S클래스는 아니더라도 우리 식구가 타고 다닐 차가 있고, 탑층은 아니더라도 등 따숩게 누울 수 있는 우리 집이 있다. 텐트가 없어도 아름다운 제주 오름은 언제든 오를 수 있고, 다이슨 드라이어가 없어도 머리 말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으니 내 삶도 내 기준에서는 충분히 풍족한데 엄마가 봤을 때에는 아무래도 내가 기울어 보이는 게지. 50만 원을 받아 들고 제주로 와서도 곧바로 다이슨 드라이어를 사지는 못했다. 용돈을 받았다고 쪼르르 문방구로 달려 나갔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마흔의 어른이 되어 엄마가 건넨 돈을, 그 마음을 헤아리고 또 헤아려 볼 뿐이었다.


다이슨 드라이어에 이어 나온 신박한 제품이 바로 다이슨 에어랩이었다. 기본 드라이어 기능뿐만 아니라 고데기롤과 볼륨빗, 롤빗을 사용해 원하는 스타일링을 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된 제품으로 가격은 드라이어보다 당연히 비쌌다. 홈쇼핑에서 하루 종일 다이슨 청소기부터 가습기, 공기청정기, 드라이어, 에어랩까지 다이슨 제품만 판매하는 다이슨 특집 방송을 하는 날 홀리듯 그 방송을 보고야 말았다. 에어랩에 고대기롤을 끼워서 머리카락에 대기만 하면 탱글탱글한 웨이브가 만들어지고 볼륨빗을 끼워 빗으면 정수리 볼륨이 봉긋 살아나는 마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알아주는 똥손인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생겼고, 특집 방송인만큼 가격 혜택이나 무이자 할부 혜택이 평소보다 좋았다. 아직 쓰지 않은 엄마 찬스를 사용할 날이 온 것이다. 휴대폰을 켜고 주문 버튼을 눌렀다. 엄마라는 히든카드 덕분에 나는 오늘도 머리카락에는 빵빵한 볼륨을, 마음에는 빵빵한 사랑을 장착하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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