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단팥빵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이다.
- 제주도에 그렇게 맛있는 단팥빵이 있다는디?
- 단팥빵? 제주도에?
동네 사우나에 다녀오신 엄마가 집에 들어서면 꺼낸 첫마디였다. 제주도와 팥의 조합이라고 하면 응당 오메기떡일 것인데 갑자기 웬 단팥빵 타령인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 머무시는 동안 이틀에 한 번꼴로 목욕탕에 가신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휴식의 방법인데 엄마가 살고 계신 친정 동네에는 목욕탕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 손을 잡고 목욕탕을 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어느 순간 목욕탕이 없어지는 바람에 버스를 타고 읍내나 온천으로 유명한 옆 동네까지 가야 한다. 때를 밀러 가기보다는 물에서 몸을 담그고 사우나에 가서 땀을 빼고 마주치는 아줌마들과 수다를 떠는 게 목욕탕에 가는 낙이랄까. 우리 집에 와 계실 때라도 편히 다니실 수 있도록 집 앞 목욕탕이 계속 흥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엄마가 우리 동네 목욕탕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벌써 7년이 다 되어간다. 유명한 관광지의 해수 사우나가 아니라 동네 목욕탕이다 보니 오고 가는 사람들이 고정적이라서 그런지 사우나에서 만나는 아줌마들도 '육지 할매'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다. 사우나가 어떤 곳인가? 이보다 더 솔직할 수는 없는 몸의 상태로 비좁은 공간에서 일정 시간을 머무르는 데다 사우나 좀 즐긴다는 아줌마들은 땀을 빼기 위해 전문적인 소품(방석, 가운, 냉커피는 기본)까지 마련하고서 아예 한자리 차지하고 있으니 누가 누군지 금방 파악이 될 터였다.(집 앞 슈퍼아주머니와 유기농 식재료 마트 언니도 엄마가 몇 달 안 보이면 엄마 요즘 왜 안 오시는지 묻는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만큼 말도 탈도 많은 곳이 바로 여자 사우나이다.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뒷담화부터 연예인 걱정, 그도 아니면 자식자랑까지 제라진 제주도 아주망들이 사투리로 말하는 것을 100% 알아들을 리 없는 엄마는 대화에 참여하기보다 주로 그네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듣는 편인데 듣는 재미가 쏠쏠하신 모양이다. 엄마의 구미를 당기게 한 단팥빵에 대한 소문 역시 이 사우나에서 들은 얘기였는데 엄마가 기억하는 단팥빵에 대한 단서는 이러했다.
1. 제주도 어디 핑크색 호텔에서 판다.
2. 미리 주문을 하지 않으면 나오는 대로 다 팔려서 살 수가 없다.
3. 누가 달라고 하면 나눠주기도 아까울 정도로 맛있다, 성심당 튀김소보로보다 맛있다.
4. 한 끼를 때우기에 충분히 든든하다.
5. 얼렸다 녹여 먹어도 맛있다.
일단 핑크색 호텔은 sk그룹에서 운영하는 핀크스 호텔인 듯했다. 검색창에 '핀크스호텔 단팥빵'을 입력했더니 그렇게 많은 포스팅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련 글이 몇 개 보였다. 사실 같은 계열인 포도호텔의 왕새우튀김우동이 유명하다고 해서 한 번 먹으러 갈까 한 적이 있었지만 우동 한 그릇이 25,000원이라고 해서 빠른 포기를 했었는데 베이커리도 그쪽에 있는 것 같았다. 베이커리를 안내하는 별도의 사이트는 존재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올려준 글에서 단서를 찾았는데 아줌마들의 말대로, 엄마가 들은 대로 단팥빵에 대한 평이 나쁘지 않았다. 한 여행객은 우동보다 단팥빵이 인상적이었다고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검색하는 과정에서 녹차단팥빵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고민이라면 단팥빵을 사자고 차로 한 시간 거리를 가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많지 않고, 신상과 유행에 민감하지도 않으며, 제주에 살지만 제주 핫플을 찾아다니지 않는 데다, 집 밖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평소의 나라면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안덕면까지 그저 단팥빵을 사겠다고 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 외손주의 방학으로 육아 도우미 소환에 흔쾌히 응해주신 엄마가 드셔보고 싶다는데 한 시간 아니라 두 시간이 걸린대도 가는 게 맞다. 주말에 찾으러 가기 위해 미리 예약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단팥빵 10개, 녹차단팥빵 5개를 주문하려고 했는데 '얼려먹으면 더 맛있다'라고 했다는 아줌마들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닷새는 더 머무실 날이 남아있으니 일부는 계시는 동안 식구들끼리 같이 먹고 일부는 냉동실에 얼렸다가 육지 가실 때 가져가시게 하면 좋을 것 같아 단팥빵 20개, 녹차단팥빵 10개로 주문 수량을 수정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채비에 나섰다. 왕복 두 시간 코스로 차 안에서 마실 물과, 커피, 아이의 음료수와 과자까지 준비하다 보니 단팥빵을 사러 나서는 길이 마치 소풍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날씨가 흐린 게 흠이었지만 가는 동안 나는 단팥빵이 얼마나 맛이 있을지, 맛이 없으면 30개나 되는 단팥빵을 어떻게 할지 걱정을 했는데 엄마는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사우나 아줌마들을 향한 신뢰도가 이 정도로 높을 일인가 싶어 놀라우면서 아줌마들 말을 믿고 빵을 예약해 찾으러 가고 있는 나도 너무 웃겼다. 초행길이라 조금 헤매긴 했지만(포도호텔이 아닌 핀크스 비오토피아 커뮤니티센터 쪽에 있었다) 목적지에 잘 도착했고 종이 쇼핑백 세 개로 나뉘어 미리 포장된 서른 개의 단팥빵을 양손 무겁게 들고 나왔다. 단팥빵은 이미 품절되어 매장에서 바로 구입은 불가능했다, 사우나 아줌마들의 말이 맞았다. 아줌마들의 말대로 미리 예약하길 잘했다.
사들고 나오면서 바로 봉지를 뜯어 단팥빵을 반으로 갈랐다. 단팥으로 속이 꽉 차 있었고 호두, 잣 등 견과류가 팥 속에 들어있어 한 끼 대용으로 충분하다는 아줌마들의 말이 이번에도 맞았음이 증명되었다. 사실 맛에 있어서 그렇게 특별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아줌마들이 말해주지 않았던 녹차단팥빵이 녹차의 쌉쌀함과 팥앙꼬의 달달함, 생크림의 고소함까지 어우러져 내 입맛에는 훨씬 맛있었다. 맛이 없지는 않다, 조금 덜 달았으면 좋았겠다는 엄마의 총평으로 단팥빵을 찾아 떠났던 여정이 단출하게 마무리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이런 마음인 것 같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것, 단팥빵이 먹고 싶다는 엄마를 위해 기꺼이 왕복 두 시간을 내달리는 것. 단팥빵의 맛이 중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