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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Jul 13. 2023

한여름 산타가 문고리에 두고 간 베이글

런던베이글을 먹어보았습니다, 드디어

그야말로 찐여름, 찌는 듯한 더위에 집 밖은 위험하다며 에어컨을 틀고 아기와 칩거하는 게 며칠 째인지 모른다(다음 달 전기세 어떡하지..후덜덜). 지인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지인 내외가 아기를 보러 잠시 들러도 되겠냐는 내용이었다.


아침에 머리는 감았지만 이미 질끈 묶어버렸고 큰 아이가 등원 전 가지고 놀다 만 레고들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때라 선뜻 오라고 하기가 망설여졌다. 잠깐만 있다 간다 해도, 같이 아기를 키우는 입장이라고 해도, 정돈되지 않은 집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살림하는 사람의 본능일 터. 그러지 말고 주말에 시간을 정해서 저녁을 먹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구했다. 숫자 1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기 보느라 확인이 늦어지는 듯했다.


아기를 돌보는 중에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바로 목욕이다. 목욕만 하면 하루 일과가 다 끝난 것처럼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평소처럼 아기를 씻기고 수건으로 돌돌 말아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언니, 바빤?

- 어, 나 지금 막 애기 목욕시켰어.

- 아 그랬구나, 안 그래도 수유하거나 다른 거 하나 했지. 문고리에 뭐 좀 걸어놨어요.

- 잉? 왔었다고? 여기까지 왔었으면 들어오지! 왜 그냥 갔어!


스피커로 통화하면서 아기 몸에 로션도 바르고 기저귀도 채우느라 손은 분주히 움직이던 때, 우유 먹어 배는 부르겠다, 목욕해서 몸도 개운하겠다, 졸음이 오는지 아기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통화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아기를 재운 뒤, 다시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통화가 연결되기 전 이미 두 통이나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메신저에 1이 지워지지 않아도, 전화를 두 번이나 받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에게 보채지 않는다.


런던베이글 뮤지엄 비닐봉투가 현관 문고리에 걸려있었다. 유난히 영롱하게 투명한 걸 보니 좋은 것이 들어있음이 분명했다. 역시나 종이봉투 안에는 베이글 4개와 크림치즈가 들어있었다. 계절은 분명 한여름인데 산타가 다녀갔구나! 백반 집에서는 김치찌개를 중국집에서는 짜장면을 먹어보면 그 집 음식이 맛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음식이 맛있다면 다른 건 안 먹어봐도 맛있을 확률 99%. 런던베이글 뮤지엄에도 다양한 토핑으로 맛을 더한 베이글이 있지만 그냥 베이글이 가장 맛있다는 평이 많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베이글을 꺼내드는 손끝마저 설렜다.


<한여름 산타가 문고리에 걸어 두고간 베이글>

베이글은 쫄깃쫄깃하면서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크림치즈는 꾸덕하고 고소한 게 시판 크림치즈보다 묵직한 맛이랄까. 맛있음에 비해 비루한 이 표현력이 원망스럽다. 사실 베이글에 크림치즈면 뭐 설명하고 자시고 할 거 없이 게임 끝이지. 손이 입에 도착하기 전에 입이 아, 하고 먼저 벌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줄을 서는 거네. 줄 서있던 사람들의 기다림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그래도 3시간은...).


다시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땡볕에 아기(지인 역시 7개월 된 둘째 아기를 키운다) 데리고 줄 서서 사온 거냐고 묻자, 이제 휴대폰 앱으로 원격 줄 서기가 가능하다고(원격 줄 서기 대환영!) 알려주었다. 자기네는 매장에서 먹었는데 나오는 길에 내가 생각나서 몇 개 담았단다.


첫째를 같은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맺어진 인연이니 벌써 여섯 해 째이다. 내가 제주가 고향이 아니라 친구가 없는 걸 알고 더 적극적으로 다정했던 사람. 알고 보니 원래는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고마운 친구가 아닐 수가 없다.


좋은 거, 멋진 풍경,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을 때 떠오르는 사람은 대개 자신에게 유의미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건 조심스럽지만 기쁜 일이다. 더구나 문고리에 베이글을 걸어주고 가는 마음이라나. 베이글보다 그 순간에 나를 떠올려주고, 집 앞까지 다녀가는 수고스러움을 감내하는 그 애정어린 마음이 고마운 거다.


당장 주말에 얼굴을 보는 걸로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남편에 아이들까지 동원하는 가족모임이 될 예정이다. 이번에 주문한 밤호박을 답례로 챙겨가야겠다. 일방적으로 흐르는 마음으로는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상대의 호감에는 환대로 응해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한여름 산타의 등장으로 답답했던 무더위가 바짝 사그라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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