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과 사위와 손주의 행복한 시간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은 2배속으로 재생하는 영화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엊그제 오신 것 같은데 벌써 아흐레가 지나 내일이면 다시 육지로 돌아가시니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던 황진이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하루라도 더 계시면 좋을 텐데 벌써 며칠째 혼자 지내며 일을 하고 계실 아빠를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신 듯 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60대 초반이라 비교적 젊은 나이신지라 엄마가 제주에 와 계신동안 아빠 혼자 식사도 챙겨드시고 빨래에, 일도 다니셨는데 칠순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니 힘에 부치시나 보다. 할머니와 100년 같이 살고 싶다는 아이는 할머니의 이른 귀가 소식에 잔뜩 코가 빠졌다.
엄마와 나 사이는 전우애가 맡바탕이다. 막막한 살림살이가 지난한 전쟁터 한 가운데처럼 느껴져 너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엄마는 나에게(물론 오빠도), 나는 엄마에게 생의 의지를 빚지며 살아왔다. 켜켜이 쌓인 해묵은 감정들은 사랑이기도, 애틋함이기도, 안쓰러움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모녀관계가 그러하듯 엄마와 나도 서로 더 해주지 못해 발만 동동이다. 요즘은 딸을 곁에 두고 친구처럼 지내는 '딸세권'이 대세라는데 하물며 같은 육지도 아니고 바다 건너 제주까지 딸을 시집보내고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듯 시려올 때가 많을 거라는 걸 엄마의 입을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외할머니가 오시자 아이는 어린이집 자체 휴원에 들어갔었다. 친구들이랑 노는 것보다 할머니와 노는 것이 더 재밌다지만 같이 뛰어놀지도, 카드 게임도, 역할 놀이도 하지 못하는 할머니와 둘만의 시간이 신나는 놀이 시간만은 못할 것이다. 그저 할머니 곁에 조금 더 머물고 싶고, 자기가 어린이집에 가면 우두커니 혼자 집에 남을 할머니가 심심할까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걸 할머니도 모르지 않는다. 할머니는 주무시는 시간도 아껴 아이를 바라보고, 따스한 체온으로 아이를 쓰다듬는다. 꿈을 꾸는 동안에도 아이는 할머니의 포근한 눈길과 보드라운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다른 두 글자로 표현한다면 바로 '아이'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일에 꽤나 반감을 느끼고 망설였던 '나'이기에 아이를 낳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감정이다. 자식의 속내를 눈치챈 엄마는 한 번도 결혼을 보채거나 서두르지 않으셨다. 엄마를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엄마에게 한 가장 큰 효도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쩌면 엄마의 삶에서 경험해보지 못할 뻔 한 할머니가 되는 데 일조했고(오빠네 조카들이 우리 아이보다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아이는 엄마의 첫 손주이자 첫사랑이다.) 엄마 자신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던 손주에 대한 내리사랑의 실체를 몸소 느끼며 충만한 행복감을 만끽하고 계시니 말이다.
정신없이 바쁜 요즘이라서 사실 엄마가 와 계신 동안 마음 편히 야근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보며 내 시간을 가지느라 정작 엄마와 보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보통 한 번 오시면 한 달씩은 머물렀던 터라 이렇게 금방 엄마가 다시 육지로 가실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짧게 계실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야근을 조금 미루고 1분이라도 집에 일찍 와서 엄마 벗을 해드렸을 텐데...... 불현듯 앞으로 남은 엄마와의 시간에 대한 데자뷔는 아닐까 싶어 아쉬운 마음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엄마와 딸로 함께 할 시간이 우리가 지나 온 시간보다 길지는 않을 거라는 당연한 이치가 이토록 서러워질 날이 오고야 말았다.
- 저녁에 삼겹살이라도 먹을까? 장모님 내일 올라가시는데.
퇴근길에 남편이 먼저 엄마를 챙긴다. 마트에 들러 간단히 장을 보고 예정에 없던 삼겹살 만찬이 시작되었다. 삼겹살은 왜 신문지를 깔고 먹어야 더 맛있는지 모를 일이다. 고기에 술도 빠질 수 없으니 엄마 덕분에 모처럼 아껴둔 와인도 오픈했다.
- 엄마, 와인 어때?
- 어떻긴 뭐가 어뗘. 엄마가 뭐 아나, 그냥 먹는 거지. 맛은 있네.
지글지글 촤르르. 고기에 버섯에 김치까지 삼박자가 두루 조화로운 불판 위의 모양새가 모자람 없이 퍽 풍족하다. 와인 맛을 모르면 어떠랴, 와인은 거들 뿐 우리가 같이 있음으로 평범했던 하루가 가치 있게 저물고 있음이다.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축복을 기원하며 잔을 부딪혔다.
그래, 고기는 구워야 맛이고, 잔은 부딪혀야 멋이지!
엄마, 내일 조심히 올라가시고. 금방 또 오셔. 우리는 또 우리 자리에서 잘 살고 있을게. 우리가 안 싸우고 서율이 잘 키우면서 서로 위하며 사는 모습 보이는 게 엄마한테 효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엄마한테 바라는 거 없어요. 엄마가 김치 담가주지 않아도 되고, 들기름도 괜찮아. 그냥 내 곁에, 우리 곁에, 서율이 곁에 오래오래 만 있어줘요. 제주에 내려온 지 5년이 넘었어도 엄마가 가는 날에는 그냥 마음이 슬퍼. 아이를 낳고 키우며 마흔 살 아줌마가 됐어도 나는 그냥 철부지 엄마 딸인가 봐. 언제나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