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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Feb 04. 2022

흔한 직장인이 오후 조퇴를 활용하는 방법

주말보다 달콤한 평일 오후

공무원들에게 1년간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연가(휴가)일 수는 21일이다. 여기에 지난 연도에 병가를 하루도 사용하지 않은 경우 병가가산연가 1일이 추가되어 총 22일을 쉴 수 있다. 사용되지 않은 연가 중 일정일은 보상을 해주고(2021년 연가보상일수는 7일이었다.) 나머지 연가는 소진하거나 버려진다. 처음 입직했을 때만 해도 근무상황 신청 결재를 상신하려면 사유를 기재하는 것이 필수였는데 어느 때부터는 사유를 적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전에는 지나치게 경직되었던 조직문화가 많이 유연해졌다는 방증일 테고 조금 더 탄력이 생겨도 좋을 것 같다.


어깨 치료를 다닌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실제로 병원에 간 것은 네 번 뿐이다, 3번의 주말과 1번의 평일 오후. 법적으로 보장받는 휴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을 하다 보면 이게 걸리고 저게 걸려서 마음 편하게 휴가를 쓰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치료를 받으라고 했거니와 명절을 앞두고 아이 머리도 단정히 할 겸 병원도 갈 겸 하루 휴가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요일이 적당할 것인지는 조금 더 고민을 해야 했다.


우선 월요일은 주말 동안 급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고, 느슨해진 몸과 마음을 다시 직장인 모드로 적응도 시켜야 하니 탈락이다. 화요일은 월요일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을 마저 해야 했다. 수요일엔 월요일과 화요일에 작성되었을 법한 공문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고 명절 전 남은 요일은 목, 금 이틀뿐이었다. 명절 대목을 앞둔 금요일에는 급한 지출 건이 있을 수 있으니 선택의 여지없이 목요일이 당첨이다. 그런데 하루 전체를 쉬자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일단 출근을 해서 병원과 미용실 예약이 가능한지를 살폈다.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둘 다 괜찮았다. 근무상황 신청 결재문서를 상신하고 오후 한 시에 사무실을 나섰다.


병원은 두 시에 예약이었고 미용실은 4시에 가기로 했다. 남편은 머리 펌을 할 때가 되었고 아이는 삐죽삐죽 어지러워진 머리카락을 다듬어야 했다. 일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고 있으면 남편이 3시에 아이를 하원 시키고 병원에서 나를 픽업한 후에 다 같이 미용실로 가는 일정이었다. 버스를 타는 게 얼마 만이던가?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면허가 없어서 버스로 이동을 했었는데 아이가 태어나고서는 병원이며 어린이집 픽업이며 운전을 하지 않으면 너무 불편한 상황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운전대를 잡은 것이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버스에 탈 때면 시야에 방해받지 않는 승차하는 문 바로 앞, 운전기사님의 대각선 자리에 앉곤 했는데 다행히 자리가 비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자니 여행을 떠나는 듯 설렘이 가득했다.


<내가 탄 제주 357 버스와 버스 정류장의 풍경>

버스를 타고 가다 정차하는 정류장에서 제주어로 쓰인 글귀가 적힌 것을 발견했다.

#승차대에서 지들립서 -> 승차대에서 기다리세요.

글씨체마저 귀여운 제주어가 정겨웠다. 그런데 이 정류장에만 쓰여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 정류장에서 곧 알게 되었다.

<교통카드는 버스에 오를 때도 찍고 / 내일 떄도 찍어야 합니다!>
<버스 타러 갈 때에는 서두르지 말고 / 미리 가서 기다리세요!>

오늘만 특별히 있는 메시지는 아닐 텐데 그동안은 왜 보지 못했던 걸까? 출, 퇴근길 시간을 앞다투어 바쁘게만 움직이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조퇴를 하고 버스를 타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 제주에 살고 있었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제주의 말들이 어느 날 보다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버스 전용차선으로 달리는 버스는 예상보다 한참 일찍 목적지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건너뛸 수는 없으니 남은 시간 동안 내가 갈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바로 병원 옆 건물의 서점. 제주에는 특색 있는 동네 서점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자주 가는 곳은 함덕의 #만춘서점 과 종달리의 #소심한책방 이다. 이곳들도 주로 주말에 찾아갈 뿐 평일에 가기에는 멀기도 하거니와 퇴근할 시간이면 문을 닫는다. 요즘은 책도 온라인으로 많이 사다 보니 시내에 있던 서점들도 많이 문을 닫았는데 #남문서점 은 올 때마다 사람들이 많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나도 그들 무리에 섞여서 선 채로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책과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안온함이 심심한 위로가 되곤 한다.


<제주여고 사거리에 위치한 제주 남문서점>

서점에 들르면 책 한 권이라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 작은 신념인지라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담겨있던 시집 두 권과 에세이 두 권을 집어 들었다. 적은 돈으로 부자가 된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하는 쇼핑은 책뿐인 듯하다. 평소 같으면 근무를 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버스를 타고, 음악을 듣고,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고 있자니(그것도 오롯이 혼자서!) 일탈이라도 하고 있는 듯 짜릿한 기쁨이 솟구쳤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 책들을 들고 근처 카페에 가서 천천히 읽어보았을 텐데 진료시간이 곧으로 다가왔다. 병원과 아이의 미용실 방문을 핑계 삼은 길지 않은 시간, 멀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오후 조퇴의 즐거움은 생각보다 크고 여운이 길게 남았다. 다른 직장인들은 오후에 조퇴하면 어떤 재미를 발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아무튼 메모, 기러기,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계절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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