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A4 한 장이 내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은 종이에는 [탄원서]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보였다.
종이를 내민 도 차장님은 몸을 굽혀 내 쪽으로 바싹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장님... 알지? 서명하려면 하구, 호연 씨
판단대로 해."
배려처럼 던진 말이지만
신입사원이었기에 덧붙여진 말이었다.
강압이 있었다면 들고 가서 호소라도 할 텐데,
선택의 가면을 쓴 압박은 조직의 최하층인 나에겐 피할 수 없는 낭떠러지이다.
몇 주 전 장면이 떠올랐다.
부장이 모 과장에게 욕설과 함께 언성을 높였다.
둘의 고집 대결에서 반쯤 밀린 부장이 마지막으로 행사한 권력이었는데,
모 과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부장은 결국 인사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인사위원회가 열리기 전까지 부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팀원들의 눈물겨운 눈치보기가 있었다.
이 탄원서는,
부장의 선처를 바라는 부서원들의 의사표명이었다.
힘없는 민초들이 늘 그러하듯, 나도 권선징악을 믿고 싶었다.
적어도 잘못을 하면,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이라면 더더욱.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그것을 위한 절차가 작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큰 벌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부서원에게 욕설을 한 부장을 위해 탄원서까지 쓰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탄원서를 서랍에 넣었다.
도 차장님은 내게 탄원서를 받으러 오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인사위원회 얘기가 돌았다.
도 차장이 탄원서를 제출하며 선처를 호소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부장은 가벼운 주의와 부서이동 처분(?)을 받고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뜻밖의 상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건이 잊힐 때쯤,
부장이 있던 부서로 내 인사이동이 예정되어 있을 때
누군가 넌지시 내게 말했다.
"그 부장님 있잖아, 호연 씨를 부서원으로 받지 않겠다고 했대."
난 그럼에도 별다른 항의나, 호소나, 사과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을 바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평범한 부서이동 루트가 아닌,
파격적인 부서이동을 했고 몇 년은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나도 내 나름대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수년이 지난 지금,
현실을 어느 정도는 깨달았지만,
또다시 그 상황에 놓인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그에 대한 대가를 기꺼이 수용하겠다.
작은 것들에도 신념과 철학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