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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Nov 15. 2018

#47.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차라리 제 등짝을 후려쳐주오

아들 방 청소를 하다가 녀석들 등짝을 세게 후려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언제 저렇게 많은 신발과 옷들을 옷장 가득히 채워 넣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몇 번 신지 않아 새것처럼 보이는 유명 메이커 신발들이 켜켜이 상자째 그대로 쌓여 있다. 후드가 달린 스웨트 셔츠는 어디서 죄다 모아들였는지 회색, 검은색, 자주색, 감색, 같은 색깔만으로 몇 벌씩 된다. 검은색 티셔츠들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비슷비슷해 보이는 티셔츠 수십 장을 무슨 욕심으로 사들였을까 아들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 아직 새 옷 레이블을 그대로 달은 채 주인에게 환대받지 못했던 옷들도 허다하다. 옷들은 옷장 가득히 뒤엉켜 엉망이니 무슨 옷을 소장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찾아 입을 새가 없었던 모양이다. 


내 못난 아들들이 또래 애들보다 옷 욕심이 많았다는 건 인정하자. 그런데, 멀쩡해 보이는 옷들을 왜 사기만 하고 다 입지는 않았을까? 산처럼 쌓은 옷가지들을 정리하며 이 많은 옷을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옷가게에 뿌렸을까 상상해 보니 내 화도 산처럼 솟아오른다. 동시에 며칠 전 아들의 익숙한 메시지, “Could you send more money?”가 다시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잔뜩 부풀어 오른 화는 한숨과 함께 땅바닥으로 이내 꺼졌다. 뻔했다. 아들에게 돈이 필요한 이유가 뭣이 더 있으랴? 부랴부랴 은행 잔고를 채워주고 났더니 몇 시간 안 지나서 아들은 인터넷에서 짤깍 옷을 구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서야 훨씬 규모가 줄어든 옷 쇼핑이라, 그래, 뭐 날씨도 쌀쌀해지고 했으니 새 옷도 좀 필요하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나는 녀석들의 과도한 쇼핑의 부산물들을 처리하느라 등골이 휘어질 참이다. 


옷을 하나씩 정리하다가 문뜩 아들들은 무슨 돈으로 이 옷들을 장만했을까 돈의 출처가 새삼 궁금해졌다. 살 때는 야금야금 돈 들어가는 줄 모르다가 한꺼번에 쌓인 물건들을 보니 이걸 다 합하면 얼마나 될까 싶어 본전 생각이 든 것이다. 대뜸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애들이 무슨 돈으로 이걸 다 샀을까? 대답은 뻔했지만 그렇다고 경악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우리가 다 사 준 거지 어떻게 샀겠냐며 나쁜 기억을 쉽게 잊어버리는 편리한 내 기억력에 비난이 쏟아졌다.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난다. 새로 나온 한정판 신발을 사기 위해 온 가족을 동원해서 추첨용 이메일 등록을 하게 하고, 아직 새 신발을 살 때가 아니라고 하면 몇 날 며칠 밤을 졸라가며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떼를 쓰며 우리의 피를 말리던 아이들. 새 신발 금지령을 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6개월 내에는 절대 신발을 사 주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달며 살았다. 신발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새 옷 사는데 친지들로 받은 용돈을 물 쓰듯 쓰던 아이들. 노트북에는 온갖 쇼핑몰의 웹사이트가 물결치고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인터넷 쇼핑 몰을 뒤져가며 온라인 쇼핑과 웹 서핑을 즐기던 아이들. 한국과 중국 쇼핑 사이트에까지 들어가서 출처도 모르는 회사의 옷을 덜컥 구입하더니 한 달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자 애를 먹던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보며 그거 봐라 하며 쌤통이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속이 상했던 나. 리턴은 또 얼마나 자주 했던가?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고, 색깔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그냥 스타일이 맘에 안 든다고. 불쌍한 우리 집 남편은 리턴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우체국으로 상점으로 날랐던 게 한두번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고 인터넷 주문 박스들이 집 앞으로 쇄도하던 그 시절을 난 벌써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니...


아이들을 쇼핑광으로 만든 데에 가장 큰 책임은 나와 내 남편에 있다. 물론, 전부, 다, 모조리 내 탓이다. 아이들을 더 검소하게 키우지 못한 것. 절제하는 법을 가르치기보단 넘치는 욕구를 넙죽넙죽 받아준 잘못. 필요 이상의 과도한 물건을 소유하게 한 것. 아… 옷가지들을 주워 담으며 이 옷들이 옷장을 채워가는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나 싶다. 아이들이 뭘 사는지에 무심했던 건 결코 아닌데, 아이들을 말리려고 하기보단 못 이기는 척하고 대부분 들어준 일이 많았던 것 같다. 뭐가 이쁘다고 아이들에게 돈을 갖다 바친 것인지. 그 알량한 자존심을 채워주려고 그들의 허영심에 배를 불렸던가? 아이들 옷을 정리하며 너무 늦어버린 반성을 해야 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지만, 쉽게 바뀔 것 같진 않다. 멀리 혼자 있는데 돈이 없어서 아쉬운 일이 많을까 봐 아이들 용돈을 대폭 인상해 준 게 지난 달이었다. 며칠 전 이달 용돈을 넣어주며, 돈 아껴 쓰라고 말하고 싶어도 쫀쫀한 엄마처럼 보일까 봐 그 대신 밥 먹는 데는 아끼지 말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쓴소리 못하는 나는 구제 불능 엄마인지 모르겠다. 남편에게 이런 나를 스스로 한심해하며 내가 애를 너무 스포일 시켰다고 하면, 남편은 나보다 한술 더 뜬다. 부창부수일까? 어려서 돈 부족할 줄 모르고 자라 보라고 해. 엄마 아빠 밑에서 아쉬울 것 없이 자란 것도 추후에 그리운 추억이 될지 모르니까. 그러면서 군말 없이 돈을 주라고만 한다. 그럴까? 정말 그럴까? 그런 추억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이들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때 힘이 되고 용기가 될까? 더 좌절 하지나 않을까? 엄마 아빠 밑에서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가 자립하고 나서 사고 싶은 신발 한 켤레 맘껏 사지 못할 때 그들이 엄마 아빠와 지냈던 풍족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그리워할까? 되레 엄마 아빠를 원망하지 않을까? 아니면 부모 밑에서 누렸던 호시절을 되찾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삶에 도전하게 될까? 


모르겠다. 꼭 무엇이 좋은 것인지는… 어렵게 자라도 배우는 게 많고, 여유롭게 자라도 반대로 잃는 게 많을 수 있다. 반대로 가난이 인생을 필요 이상으로 고달프게 하기도 하고, 부유한 가정이 마음의 여유로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에 따라서 긍정적인 자극이 부정적으로 되기도, 또 부정적인 자극이 의외로 긍정적으로 삶을 바꿔 놓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래서 육아의 길엔 정답도 없고 끝도 없는가 보다. 그저 바라는 바는 내가 어떤 부모로 어떤 형편에서 어떻게 자녀를 키웠든 자녀가 알아서 바르게 성장해 가기를 뻔뻔하게 욕심내고 싶을 뿐이다. 그게 부모 마음이 아닐까 싶다. 젊어서 옷가지와 신발로 옷장에 산을 만들었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흥청망청 살아가지는 않겠지 하며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미국 유학시절이 떠오른다. 엄마에게로부터 군말 없이 매달 넉넉한 용돈을 받으며 돈 걱정없이 유학생활을 편안히 보냈다. 그 때 우리 엄마도 나랑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엄마가 보내주는 돈을 받아 쓸 때는 돈이 얼마나 귀한지 몰랐는데, 유학생활이 끝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돈의 절실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퍼 주었던 돈을 그리워하며 엄마의 사랑에 감사했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자식 교육을 위해 돈을 아낌없이 보내주었던 엄마의 헌신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내가 아들에게 이렇게 물러 빠진지도 모르겠다.  


방 정리를 하다가 한국에 있는 아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옷이랑 신발 정리할 건데 갖다 버려도 괜찮은 거야? 했더니 의외로 주저하는 듯한 말투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다 필요 없다고 갖다 버리라고 했으면 물건 아낄 줄 모르는 아들 녀석의 등짝을 (당장은 못하지만) 기어이 후려쳤어야 했을지 모른다. 박스에 옷을 다시 넣으며 아들이 이 옷가지와 신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전부, 닳도록 입어 주고, 신어 줄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하지만, 그런 날이 과연 올진 글쎄… 차라리 제 등짝을 누가 정신 나게 때려 주실 분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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