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다운타운에서 나만의 산책코스로 제일 먼저 생각한 길은 Mytle Edwards 파크였다. 크지 않은 공원이지만, 퓨젯사운드가 융단처럼 펼쳐진 물가 바로 옆에 위치한 시애틀 도심 공원이다. 십 수년 전에는 여기서 불꽃놀이도 했다. 그때는 독립기념일 불꽃놀이를 이곳과 Gas Works 파크 두 군데에서 했었다. 나도 시애틀에 산 지 제법 오래됐다는 증거.
Myrtle Edwards Park, Seattle
머를 에드워드 파크로 들어가는 입구는 시애틀 조각공원의 입구와도 맞닿아 있다. 여차하면 조각 공원도 둘러볼 수 있어 일석이조의 산책길이다. 몇 걸음 걷는데 눈 앞에 희고 커다란 작품과 마주쳤다. 둥그렇고 하얀 머리가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하우메 플렌자의 Echo라는 작품.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도심 속 파크는 모두 자신의 전시장으로 사용하는 작가다 보니 알게 모르게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을 많이 지나쳤었다. 바로 지난주 롯데월드타워가 자리한 그 공원 앞에도 이 분의 작품이 있었는데 그만 콘서트에 늦을까 바쁘게 지나쳤으니까.
Possibilities, Lotte World Tower, Seoul, Korea
시애틀에도 이분의 작품이 있는 줄 오늘에서야 알았다. 조각 공원이 오픈한 지가 꽤 되었고, 그 뒤로 자주 나오지 못했더니 그새 작품이 군데군데 많이 늘었다. 오늘은 Echo작품만 관심 있게 봤지만 다음에는 다른 작품들도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Echo, Seattle
Echo는 사진을 어느 각도에서 찍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느낌을 준다. 앞모습이냐, 옆모습이냐, 왼쪽 옆인가 아니면 오른쪽에서 바라보는 옆모습인가, 심지어 뒷모습에 이르기까지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 같은 분위기를 준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하얀 얼굴이 마치 부처의 모습을 연상하게도 하고, 비대하게 커다란 두상만 우뚝 땅에서 솟아난 느낌이 기괴하기도 하고, 분가루가 떨어질 것 같은 하얀 얼굴에 아무런 윤곽도 표정도 없어 얼굴이 아닌 떡 덩어리의 느낌만 들기도 하다. 오늘같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보면 꿈을 꾸는듯해 보이지만, 비가 오는 날이나 회색빛 시애틀 하늘과 어울리면 우울한 표정으로 바뀔지 모르겠다. 에코라는 메아리와는 전혀 상반되게 굳게 닫힌 입술에 나도 침묵하고 조용히 공원을 걸어가라고 명령하는 것만 같다. 공원에서는 말없이...
Echo, Seattle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SAM (Seattle Art Museum) 사이트에 나온 짧은 설명을 읽어보니,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님프 에코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나는 오늘에서야 메아리의 원조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사랑한 에코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제우스가 님프를 좋아해 자주 찾아가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 벌로 에코에게 다른 사람이 한 말의 마지막 낱말 밖에는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시애틀의 조각 Echo는 이미 헤라의 벌을 받았나 보다. 아무 말 못 하고 잠잠히 있다. 그냥 퓨젯사운드로 얼굴을 향하고 있을 뿐. Echo의 마지막 단어는 퓨젯사운드 저 반대편의 올림픽 산에서나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