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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우아맘 Apr 13. 2023

04. 전업맘은 처음이야! 그것도 미국에서!

멋진 엄마 연습 중.



미국 생활은요... 음...


신랑이 덜컥 미국 MBA에 합격을 했고, 난 많은 고민 끝에 미국행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신랑과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왔다. 풀어야 할 많은 숙제를 뒤로 한 채, 겁 없는 '도전'을 시작했다. 난 한국에서 10년 동안 워킹맘을 했기에,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은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된 나의 미국 생활은 사실 우여곡절 많다. 국에 오고 처음 3개월 내내 집에서 가족들 밥만 차려줘야 했다. 그때가 미국 초등학교 여름방학이 시작할 즈음이라 아이들은 미국 학교에 가보기 전에, 달콤한 방학부터 신나게 다. 덕분에 난 기대이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그렇게 난 종일 아이들과 함께 하며  전업맘이 되었다.


미국에 오면 신랑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둘 다 너무 바빴으니. 그러나 신랑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공부할게 많아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남편 바쁜 거야 이해해야지. 그런데 문제는, 당시 내 운전면허증 발급에 문제가 생겨 미국에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미국에선 차 없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으니, 아이들과 딘가 나가는 일 꿈도 꿀 수 없었다. 국에는 왔으나, 미국 TV 채널을 틀어놓지 않으면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알 수 없었다. 국에 오기 전에 미국 생활에 대해 많이 상상해 봤다. 물론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하고 왔다. 그러나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어이없는 최악의 상황이 계속됐다.





엄마, 소머리국밥 해주세요!

아이들도 많이 답답했겠지. 하지만, 둘이서 뒹굴뒹굴 놀고 책 보고, 만들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파이팅 좀 해주시고. 나름 살 방법을 찾아가는 녀석들을 보며 힘을 이 얻다. 나도 이 상황을 잘 이겨내야지.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아이들, 남자아이 둘은 생각보다 많이 먹고, 먹고 싶은 메뉴도  많다. 당시 전을 할 수 없다 보니 마트 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러나 아이들에게는 종일 삼시 세끼에, 다양한 간식지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10년 워킹맘에, 요리에 별 관심이 없던 나에게 요리는 난이도 있는  중에 하나였다. 그것도 미국에서 말이지. 그러나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할 수밖에 없는 최적의 상황이 됐다. 역시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고, 닥치면 다 한다고 하지 않던가. 덕분에 난 미국 정착 3개월 동안 정말 다양한 요리를 했고, 요리 실력도 좀 늘었다고 자부다.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그래야  내가 버틸 수 있으니 최대한 나 스스로 멋지다고 다독여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요리도 좀 맛있어진 거 같아요." 

칭찬 비슷한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집에서 할머니가 해주시던 소머리국밥이 너무 먹고 싶어요. 이제 엄마도 요리 잘하니까, 소머리국밥 좀 해주세요. " 

칭찬으로 시작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일을 는 동안, 무려 10년 동안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많이 돌봐주셨다. 덕분에 아이들은 손맛 좋은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신 건강식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런데 미국땅에 오니 할머니가 해주음식이 그렇게 먹고 싶단다. 그중에서 소머리국밥이라. 그것도 식재료부터 구하기 어려운 미국에서 말이지. 지금 나에겐 난이도 최상의 음식이다. 사실 나도 먹고 싶다. 우리 엄마, 유 여사님이 해주신 따끈한 소머리국밥. 괜히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날이다.





멋진 엄마란,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는 항상 집에 계셨다. 엄마는 집에서 언니와 나, 동생을 반겨주셨고, 항상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 주셨다. 난 엄마가 집에 계신 게 포근하고 따뜻하고 너무 좋았다. 엄마는 요리사 자격증도 여러 개 갖고 계셨다. 엄마의 음식은 다 맛깔스러웠고, 음식을 먹는 사람을 참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억에  당시엔 여자 운전자가 많지 않았는데, 엄마는 우리 동네에서 소문난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여자 운전가 적다 보니, 여자가 운전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멋지게 보였다. 그리고 엄마는 가끔 재봉틀로 뚝딱 잠옷도 만들어 주셨다. 심지어 한 번은 예쁜 원피스 만들어 주셨고, 그 걸 입고 학교에  날 친한 친구가 엄청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마술사처럼 뭐든 뚝딱 만들어주시는 엄마가 너무 멋지고 단하고 자랑스러웠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난 어렸으니까. 그 당시에 엄마 본인도 스스로가 멋지다고 생각하셨겠지?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가 꼭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난 엄마가 손재주가 아주 좋다는 사실을 몰랐다. 엄마가 되면 다 그렇게 하게 될 줄 알았다. 엄마 덕분에 어린 나에겐 '엄마'라 함은 마술사처럼 뭐든 다 만들어내 멋진 사람으로 기억된다. 리고 이런 멋진 엄마, 유 여사님 덕분에 나도 엄마처럼 멋진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꿈꾸기도 했다.


오히려 엄마가 되고 보니 멋진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더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어렸을 때 생각한 기준으로 보자면, 엄마라 함은 소머리국밥 정도는 뚝딱 만들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난 빵점 엄마겠지. 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워킹맘으로 일한 10년 동안 난  내 일을 사랑하는 모습을 아이들도 배울 것이라고 믿었다. 과거의 내 모습도 충분히 멋 엄마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과거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또한, 지금의 나는 미국에서 가족들을 위해 소머리국밥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모습도 충분히 멋지다고 인정해주고 싶다. 그래야만 내가 더 힘을 내고 나아 테니까. 그런데 우리 엄마, 유 여사님이 해주시던 진한 소머리국밥 맛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날이다.


미국집 주방 창에서 보이는 back yard 모습. 미국 생활 초반 음식을 하느라 주방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하루 중 가장 많이 본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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